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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기
최고의 행복은 권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에 있다. 이것이 나의 원칙이며 교육에 접목시켜야 할 핵심이다.
교육은 세 가지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자연·인간·사물이 그것이다. 자연은 인간을 내적으로 성장시키고 인간은 그 성장을 활용하도록 돕는다. 반면 사물은 그것과 부딪쳐 얻는 경험의 측면에서 교육을 돕는다. 모든 교육은 이 세 가지 스승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세 가지 스승의 가르침이 서로 조화롭게 이루어질 때만이 인간은 제대로 교육받았다고 할 수 있다.
나무는 수직으로 상승하고자 하는 욕구를 갖고 있다. 이것은 식물의 본성이어서 억압에 의하지 않는 한 그 자세를 잃지 않는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나무를 구부러뜨려 놓으면, 그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더라도 그 구부림의 흔적이 남는다. 하지만 이 흔적은 일시적일 뿐이다. 식물이 성장을 지속하는 한 그 본성은 다시 나무를 수직으로 자라게 한다. 인간의 성향 또한 비슷하다. 동일한 상태가 지속되는 한 습관에서 비롯된 그 성향은, 설령 그것이 부자연스럽다 하더라도 줄곧 유지된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면 습관은 사라지고 자연으로 되돌아간다. 교육 역시 이러한 습관일 뿐이다.
모든 사회는, 결속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기적이다. 애국자의 눈에는 외국인이 무가치하게 보일 수 있다. 스파르타 사람들은 타민족에게 냉혹하고 인색했지만 자국민에겐 공평무사하고 따뜻했다. 중요한 것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선량하게 대하는 것이다. 자신의 의무는 이행하지 않으면서 먼 나라 사람들의 의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철학자들을 경계하라.
사회라는 질서 안에서 자연 감정을 우위에 두고자 하는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을 구분하지 못해 늘 방황하는 존재, 시민도 될 수 없고 인간도 될 수 없는 존재이다. 타인에게 있어서나 자신에게 있어 아무런 이득도 주지 않는 그런 존재
자연인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한다. 그는 단지 독립된 실체일 뿐이다. 반면 시민은 분모에 의해 값이 결정되는 분자와 같은 사회적 존재이다. 훌륭한 사회제도란 인간의 본성을 유연하게 변화시켜 그 사회의 가치에 맞게 상대적인 존재, 즉 ‘나’를 ‘우리’라는 공동체로 융합시키는 제도이다. 이 제도 안에서 ‘나’는 더 이상 단순한 개체가 아니다. 전체를 의식하고 사고하는 사회적 유기체 속에서의 ‘나’이다.
훌륭한 사회적 존재가 되기 위해선 언행이 일치해야만 한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땐 자신의 방침에 근거해 심사숙고하되 한번 결정한 사안에 대해선 과감하게 실천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교육기관을 자처하는 세상의 어떤 기관도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한 교육은 겉으로는 사회적 인간을 지향하는 것 같지만 실상 이기적 인간만을 양산하는 데 적합할 뿐이기 때문
자기만 생각하며 자란 인간이 남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바람을 거슬러 항해하기 위해 돛을 조정하는 데 신경 써야 함은 물론, 때론 정박하고 때론 움직이면서 조수의 차이에도 대비해야 한다. 각자의 지위가 정해져 있는 오늘날의 사회 질서 속에서 교육의 효과를 기대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지위에 맞춘 교육은 그 지위의 환경이 바뀌는 순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결과를 낳는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그것을 잘 견뎌낼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참교육은 훈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제대로 된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선생만이 필요
세상사는 끊임없이 변하며 금세기의 혼란스런 양상에 비춰볼 때 그 정도는 점점 더 심해져 갈 것이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아이를 키운다면, 그 아이는 환경이 바뀌는 순간 곧 파멸에 이르고 말 것이다. 그러한 식의 교육은 고통을 극복하도록 하기보다는 고통을 느끼도록 가르치는 셈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를 보호하기에만 급급한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행여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지 않을까, 죽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태도이다. 인간은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다. 아이가 죽지 않도록 하기보다는 아이가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단지 목숨을 부지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 감관을 총동원해 자아를 느끼고, 가진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가장 오래 산 사람은 가장 나이 들어 죽은 사람이 아니라 인생을 잘 느끼다 죽은 사람이다.
어머니의 사랑과 보살핌이라는 정신적 자양분은 아이에게 있어 모유를 먹이는 일보다 그 가치가 결코 작지 않다.
우선 어머니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것이 자연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 필요한 첫째가는 의무이다. 어머니가 그 의무를 다하면 가정은 화목하고 활기가 넘친다. 어머니가 그 의무를 소홀히 하면 가정은 위축되고 파괴된다. 갓 태어난 아이를 보고도 남편은 별 감동을 느끼지 못하며 아내에 대한 마음도 시큰둥하게 되어 온기 없는 가정이 된다. 혈연의 정을 다질 기회는 사라지고 각자는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게 된다.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가 소중한 나머지 필요 이상으로 떠받들어, 아이를 보호하기는커녕 더욱 나약하게 만든다. 자연의 법칙에 지배되길 두려워하는 이러한 양육 태도는 훗날 아이에게 큰 상처를 줄 것임에 틀림없다.
자연을 관찰하고 그 길을 따라가라. 자연은 아이를 훈련시킨다. 온갖 종류의 시련을 겪게 함으로써 체질을 강화하고 고통이 무엇인지, 아픔이 무엇인지 가르친다. 눈 앞의 역경에 겁내지 말라. 어려서의 시련을 극복하면서 아이가 지닌 생명의 뿌리는 더욱 튼튼해진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
경험에 의하면 애지중지 키운 아이의 사망률이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힘에 부치지 않는 한 그 힘을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덜 위험하다. 굶주림이나 추위, 갈증 같은 환경에서도 아이가 견딜 수 있도록 단련시켜라. 안일함의 습관에 머물지 않도록 지옥의 강물에 빠뜨려라. 어린 나무줄기는 어렵지 않게 휠 수 있지만 굳은 나뭇가지는 견디지 못한다.
인간의 운명은 끝없는 고통의 연속이다. 육체적 고통도 있지만 정신적 고통도 있다. 육체적 아픔만 겪어도 되는 어린 시절의 고통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자라서 맞이할 운명의 고통을 생각해보라. 사람을 절망케 하는 것은 정신적 고통이다. 우리는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지만 정작 불쌍한 것은 어른들이다. 고통은 마음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교사가 많은 것을 가르치는 것 같지만 정작 필요한 것들, 자신이 누구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것이며 행복한 삶인지에 대해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 아이는 지식은 가득하지만 지각이 없다. 지각이 없으므로 분별도 있을 리 없다
능력이 있음에도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은 범죄
오, 이 얼마나 천박한 마음인가. 돈으로 아버지를 사줄 수 있다고 믿다니. 그런 인간들은 자식에게 교사를 사준 것이 아니라 하인을 사준 것이다. 그 하인은 당신의 자식을 또 하나의 하인으로 만들 것
훌륭한 교사란 어떤 인물인가. 무엇보다 돈에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몸담을 수 있는 직업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군인이고 하나는 교사이다. 어떤 사람이 내 자식의 교사가 돼야 하는가. 그것은 당신 자신이 돼야 한다. 아버지인 당신 자신이 그 일을 할 수 없다면 친구라도 돼주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 그 자체가 그를 교육시키지만 부유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 부유한 사람의 교육이란 대체로 결함투성이이기 십상이다. 게다가 자연의 교육은 한 인간을 모든 인간의 조건에 적합하도록 만드는 것임을 잊지 말자. 상대적으로 볼 때 가난한 자가 부자로 될 확률은 그 반대의 경우보다 적다. 즉 부자들의 몰락이 그 반대보다 더 많으며 자연스럽다.
몸이 허약하면 요구하는 것이 많아진다. 그것은 무절제를 부르고, 그것이 정념을 자극한다. 하지만 몸이 그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므로 그것 때문에 더욱 초조해진다.
도대체 시체 같은 존재를 걷게 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오늘날 의술이 유행하게 된 데는 하릴없이 빈둥거리며 신체 보전에만 연연하는 속물들의 영향이 크다. 만일 그들이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태어났다면 비참했을 것이다. 다행히 죽음은 그들의 곁에 있고 의사들 또한 그들의 곁에 있다. 그들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해줄 즐거운 의사가.
우리가 진리에 연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거짓말에 속는 일도 없을 것이며, 자연에 거스르면서까지 치료받고자 하지 않는다면 의사의 손에 죽을 일도 없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이를 구분하고 절제할 줄 안다면 그는 매우 현명한 사람이다. 따라서 나는 의술이 몇몇 사람에게는 유익할 수 있을지언정 전체 인류의 관점에서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
우리가 뭔가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그것의 위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아픔을 참는 법을 알게 하라. 그것이 자연의 기술이다. 동물들은 병에 걸리면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참음으로써 그 아픔을 극복한다. 그러나 인간들은 조금만 아파도 견디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면 낫게 될 병인데도 걱정과 불안에 싸여 초조해한다. 확실히 인간보다 동물이 더 자연에 순응하며 살고 있다
인간은 군집 생활을 하기에 적합한 동물이 아니다. 사람들은 모여 살면 살수록 더 타락한다.
인간의 성장 단계와 깨달음의 순서를 생각해보라. 경험 없는 그 무지의 단계가 최초의 어리석음의 단계와 얼마나 흡사한가를.
가장 좋은 습관은 어떠한 습관에도 물들지 않는 습관이다. 아이의 행동을 규격화하고 양식화하지 말라. 아이를 안아줄 때나 잡아줄 때도 한쪽 팔로만 하지 말라. 습관에 좌우됨 없이, 아이의 의지대로만 움직이도록 사전에 예방하고 조처하라. 그리하여 언제나 자기 자신이 주인이라는 점을 각성시켜라.
거미가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집에서 자란 아이는 거미를 두려워하는데, 이로 인한 습성은 어른이 되어서까지 이어진다. 어떤 사물에 대해선 친숙한 반면 다른 사물에 대해선 경계심을 갖는 태도는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편향된 인식을 갖지 않도록 경계하라. 뱀이나 두꺼비 같은 혐오스러운 동물도 자주 보면 익숙해지고 두려움이 사라진다.
에밀에게 재미있는 형상의 가면부터 보여줄 것이다. 그런 다음 누군가에게 그 가면을 씌워놓고 웃는다. 나도 웃고 근처에 있던 모든 사람이 다 웃는다. 마침내 에밀도 웃는다. 이것에 성공하면 그 다음은 식은죽 먹기다. 점차 덜 유쾌한 가면 쪽으로 형상을 바꿔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에밀은 아무리 흉측한 가면을 보더라도 결코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
갓난아이는 기억력과 상상력이 아직 발달돼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반응이 원초적이다. 직접적인 자극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까닭에 무엇이든 만져보려는 경향이 있다. 이때 그것이 명백하게 위험한 것이 아닌 한 제지하지 말라. 아이는 이런 행위를 통해 자신의 감각을 실제화시킨다. 보고 만지고 듣고, 뜨거움과 차가움을 느끼고, 딱딱함과 부드러움을 감별해내는 모든 것이 교육
아이가 응석을 부릴 때 그 숨은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
사람에게든 사물에게든, 아이는 결코 주인이 아니다. 아이에게 지배나 복종의 관념이 깃들게 해서는 안 된다. 아이의 욕구가 정당한 것이라면 분별 있게 대응하라. 원하는 것을 갖다주지 말고 그쪽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라.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 아이는 자신의 위상에 맞는 합리적 결론에 이를 것
아이가 고약한 성격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아이가 약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강하게 키워라. 그러면 아이는 착해질 것이다. 강인한 사람은 결코 악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전지전능하다고 믿는 신에게서 선한 의지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사람들은 신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악보다 선을 항상 우위에 놓는다.
이성이 반짝이기 전까지 인간은 선악을 판별하지 못한다. 아이가 분별없이 행동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도 야만적인 짓을 서슴지 않는다.
첫번째 원칙. 본래 아이는 힘이 없다. 자연의 요구에 부응하기조차도 벅차다. 그러므로 자연으로부터 받은 모든 힘을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그래도 그 힘을 남용할 줄 모른다. 두번째 원칙. 지적으로든 체력적으로든 아이에게 부족한 것은 보충해주어야 한다. 세번째 원칙. 아이를 도울 때는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에 국한하되, 엉뚱한 환상이나 까닭 없는 욕망에 호응해서는 안 된다. 환상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므로 발동을 제한하면 고통도 생기지 않는다. 네번째 원칙. 아이의 표정과 행동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아이의 욕구가 자연스러운 것인지 억측의 결과인지를 잘 판별해야 한다.
그러나 아이를 도울 수 없다면 그냥 놔두어야 한다. 아이를 달래준답시고 비위를 맞추거나 어르지 말라. 그런다고 아픈 아이의 몸이 낫는 것은 아니다. 대신 그러한 행동은 아이에게 잘못된 편견을 심어준다는 것을 명심하라. 어떻게 해야 자신을 달래주는지를 아이가 알게 되면, 그 아이는 이제 당신의 주인이 된다. 그러면 끝이다.
아이의 잘못된 고집을 꺾는 방법은 간단하다. 아이보다 당신이 더 고집 세면 된다. 아이가 울면 울수록 당신은 더 냉랭하게 침묵을 유지해야 한다.
사람들은 좀 더 검소해야 한다. 아이들이 갖고 노는 물건들만 봐도 필요 이상으로 돈을 들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은방울이나 금방울, 산호나 수정 등 온갖 종류의 값비싼 물건들을 아이에게 준다. 도대체 왜 이런 허영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과일이나 잎 달린 나뭇가지, 씨앗이 부딪쳐 소리를 내는 양귀비 열매 또는 빨거나 씹을 수 있는 감초 뿌리 등만 있어도 된다. 아이에겐 이런 것들이 훨씬 더 즐거우며 유익하다.
대화에서의 근본은 내 말을 상대방이 알아듣게 발성하는 것이다. 불분명한 발음과 모호한 억양은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한다. 억양은 대화의 생명이다. 그것은 대화에 감정과 진실을 부여한다.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들이 그토록 억양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말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면 스스로 잘 말할 수 있게 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놔두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저절로 말을 하게 된다. 말을 빨리 배운 아이들은 발음도 정확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말을 옳게 이해할 틈도 없다. 하지만 늦게 배운 아이는 자연적인 순서에 따라 쉬운 말과 쉬운 발음부터 받아들인다. 천천히 관찰하고 그 의미를 확인한 후에 상대방의 말을 수용하는 것
아이는 자신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실제적으로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아동기
아이가 천성적으로 잘 우는 체질이라면 나는 그 체질을 바꿔줄 것이다. 울고 있는 한 나는 그에게 다가가지 않을 것이며 울음을 그쳐야만 다가갈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가 나를 필요로 할 때는 조용히 도움을 요청할 것이고, 웬만큼 고통스럽더라도 자신의 처지를 살펴줄 사람이 주위에 없다고 판단하는 한 잘 울지 않을 것
넘어지거나 부딪혀 다쳤을 경우, 혹은 코피를 흘리거나 손가락을 베었을 경우에도 나는 서둘러 그에게 쫓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봤자 상황이 개선되지도 않을 뿐더러 이미 주어진 아픔은 참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
아이는 어른을 통해서 자신을 판단한다. 내가 두려워하면 아이도 두려워하고, 내가 침착하면 아이도 차분해진다. 고통을 필요 이상 과장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래서 고통의 단계에 맞는 아픔만 수용하는 의연함을 길러줄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면 더 큰 고통이 찾아와도 참아낼 줄 알게 된다.
아이는 고통을 알아야 하고 위험이 무엇인지 겪어봐야 한다. 그런 경험이 아이를 강하게 한다. 작은 경험이 장래의 보다 큰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그럴 때 아이는 같은 위험이라도 좀 더 잘 대응한다.
고통에 대한 학습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작은 상처에도 기절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 그렇게 되도록 과보호로 아이를 격리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
서둘러 접근하면 오히려 두려움만 키워 아이가 아픔을 더 크게 느낄 수 있다. 이 경우 상처보다 공포가 더 큰 괴로움을 줄 수 있는데, 내 방식대로 한다면 적어도 이 두번째의 괴로움은 막아줄 수 있을 것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교육을 참고 견뎌야만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
아이들의 천성을 독려하라. 당신에겐 그 아이들의 행복을 빼앗을 권리가 없다.
미래의 행복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현재의 불행 만들기! 어처구니없는 일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행복하다든지 절대적으로 불행하다는 게 없다.
모든 고통은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과, 모든 쾌락은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과 결부돼 있다. 이 욕망은 결핍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 결핍은 고통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불행은 이 욕망과 능력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이 둘 사이의 균형을 완벽하게 유지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절대적으로 행복할 것
욕망을 줄일까? 하지만 이 문제는 욕망을 줄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욕망을 능력 아래로 축소하면, 남아 있는 능력의 일부분이 한가하게 되어 우리의 존재를 온전히 향유할 수 없기 때문
진정한 행복은 능력을 넘어서는 욕망을 줄이고 힘과 의지를 평형 상태로 유지하는 데 있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의 몸과 마음이 질서를 잡아, 몸은 활동 상태에 있으면서도 영혼은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
능력의 확대는 필연적으로 욕망의 확대를 가져오고, 이것은 더 큰 불행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
자연이 애초에 부여한 것은 인간의 자기 보존에 필요한 욕망과 그것을 충족할 만큼의 적절한 능력뿐
그 밖의 모든 능력은 필요할 경우 발달하도록 인간의 내면 깊숙이 숨겨 놓았다. 욕망과 능력의 일치가 이루어져 불행하지 않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원초적 상태에서뿐
대상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그 대상은 멀어져간다. 잡았다고 생각해서 보면 그 대상은 이미 그 전의 대상이 아니다. 만족은 결코 욕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인간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결핍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결핍을 느끼게 하는 욕망 때문
현실의 세계에는 한계가 있지만 상상의 세계에는 한계가 없다. 우리의 능력으로 제한할 수 있는 것은 상상의 세계뿐이다. 그러므로 상상의 세계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현실과 상상의 간극이 넓으면 넓을수록 불행하므로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신체의 고통과 양심의 가책을 빼고 나면 불행은 모두 상상적인 것에서 연유한다. 누구나 다 아는 것 같지만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욕망에 비해 가진 능력이 더 월등하다면, 벌레 같은 미물이라 할지라도 그 존재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가진 능력에 비해 욕망이 더 크다면, 사자나 영웅이라 할지라도 그 존재는 약하다고 할 수 있다. 무릇 만물은 본성에 충실할 때 강하다.
능력을 키우면 강해질 것이라는 믿음은 그러므로 편견에 불과하다. 능력보다 오만이 커질 때 오히려 그 능력은 줄 것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가진 능력 안에 머무를 수 있다면 우리는 항상 만족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나약함을 불평할 일도 없거니와 약하다는 느낌조차 갖지 않을 것
지나치게 소유함으로써 불행해지지 말라. 지나치게 행복하려고 애쓰지 말라. 그 욕망이 당신을 불행하게 할 것
현명한 사람은 현실 너머에 있는 어떤 가치에 대해 더 주목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단 한번 경험할 뿐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앞날에 대한 생각이 우리를 불행으로 이끈다. 불확실한 미래를 전망하면서 현재를 소홀히 한다는 것은 얼마나 미친 짓인가! 이 미친 증상은 나이를 먹으면서 더욱 커진다. 그래서 노인이 되면 의심도 많아지고 탐욕 또한 증가하게 되어 미래에 더욱 집착하게 된다. 이 집착이 모든 것으로 퍼져나간다.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으로 확산
되고, 모든 인간과 모든 사물에게로 전염돼 현존하는 것과 앞으로 있게 될 모든 것에 대해 신경 쓰게 된다. 이제 우리 자신은 우리에게 아주 작은 부분밖에 되지 못한다.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안으로 제한하라. 그러면 당신은 불행하지 않을 것이다. 자연이 삼라만상의 질서 안에 정해준 그 자리에 머물도록 하라. 그 자리에서 당신을 끌어낼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필연의 법칙에 저항하지 말라. 아울러 그 법칙에 저항하기 위해 하늘이 준 힘을 낭비하지 말라. 그 힘은 수명을 연장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 보존하라고 준 것
최고의 행복은 권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에 있다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만 하되, 하고 싶은 일만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나의 원칙이며 교육에 접목시켜야 할 핵심
아이는 스스로의 약함을 느껴야 하지만 그 약함 때문에 고통 받게 해서는 안 된다. 의존하되 복종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요구하되 명령하도록 해서도 안 된다. 아이는 스스로 필요할 때만 타인에게 복종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의 생존에 더 유익한지 다른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그럴 뿐이다. 그러므로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면, 심지어 아버지조차도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
욕망에 비해 능력이 부족하다면 그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다.
아이의 경솔한 행위에 대해서는 그 행위로 인한 불리함으로 잘못을 깨닫게 하라
아이는 필요 없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뛰고 싶을 땐 뛰게 하고 울고 싶을 땐 울게 하라. 모든 행위는 스스로를 단련하기 위한 신체의 요구에서 비롯된 것
아이가 자신의 요구사항을 쟁취하기 위해 말로써가 아니라 울음으로써 호소한다면 단호하게 그것을 거절하라는 것
우는 모습이 안쓰러워 요구를 들어주게 되면 그것은 잘못 가르치는 셈이 된다. 우는 버릇을 키우는 셈이 되며 요구대로 응해준 선의를 의심하도록 가르친 셈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었다면 아이가 의사 표시를 하는 순간 바로 들어주어라. 그렇지 않았다면 거절하되 번복하지 말라.
당신의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확실한 방법이 있다. 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갖게 하라.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갖게 하라. 욕망은 날로 증대될 것이고 그에 따라 당신의 능력은 고갈될 것이다. 언젠가 당신은 아이의 요구를 거절해야만 할 시기가 올 것이고 그러면 아이는 미칠 것이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고통보다 익숙하지 않은 당신의 그 거절 때문에 아이는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원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손에 쥘 수 있었던 아이는 그 거절을 배신으로 여길 것이다. 아이는 이치를 따질 줄 모르므로 당신의 어떠한 설명도 변명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는 사방에서 악의를 볼 것이고, 이는 아이의 본성을 비뚤어지게 해 모든 사람들을 미워하게 할 것이다. 오만한 폭군이 되어 날뛸 것
이런 아이는 노예 가운데서 가장 비천한 노예이며 불행한 인간
나약함과 지배욕이 광기와 불행을 만들어낸다. 그들의 불손한 태도와 경박한 허영심은 모욕과 경멸과 조롱만을 불러 올 뿐이다. 그들은 마치 물을 마시듯 치욕을 삼켜야 하리라. 가혹한 시련을 통해 그들은 곧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무지와 무능을 통감하게 되리라. 예기치 못한 장애로 인해 의기소침하게 되고 너무나 많은 멸시로 인해 비굴하게 되리라.
아이들이 이성을 갖기 전에는 도덕적 존재나 사회적 관계 등에 관한 어떠한 관념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념을 나타내는 말은 가능한 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가 그릇된 관념에 오염될 수 있기 때문
가장 훌륭한 교육이란 이성적인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아이는 당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선이나 악, 인간이 지켜야 할 의무 등을 이해하는 일은 아이의 영역이 아니다. 어른이 되기 전까지 아이는 아이로서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자연의 질서이다. 이 질서를 거역하면, 우리는 설익고 맛도 없는 과일을 속성으로 재배하는 것과 같다. 아이를 꼬마 박사와 애늙은이로 만들어서 좋을 게 뭐 있겠는가? 아이는 보고 느끼는 데 그 나이에 맞는 사유 방식을 활용한다. 어른의 방식으로 생각하길 강요하지 말라. 사실 그 나이엔 이성이 필요하지도 않다. 이성은 힘을 억제하는 장치이다. 아이에겐 그런 장치가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반항보다 복종이 더 이익이고 편리한 처세 방식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아이들은 가면을 쓰게 된다. 나쁜 짓을 하다 들켜 그가 잘못을 인정했다고 치자. 그 인정은 반성의 결과가 아니다. 더 큰 벌을 받을까 두려워, 혹은 용서받을지 모른다는 희망에서 나온 행동일 뿐이다. 아니면 단지 귀찮은 상황을 모면하고 보겠다는 발상일 수도 있다. 아이는 결코 당신의 이성에 설득된 것이 아니다. 그 나이의 아이에게 인간의 의무 따위를 이해시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이는 약하고 어른은 강하다는 사실만을 알게 하여 그가 복종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해야 한다.
한 번 거절한 사항에 대해서는 절대로 번복하지 말라. 아이는 당장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을지 모르지만 장차 얻을 수 있는 것은 더 많을 것이다. 참을성 있고 변덕 부리지 않으며 체념을 아는 아이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의 필연성에 대해 인내심 있게 대응하는 것이야말로 곧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거짓말이라고 여기지 않는 한 ‘이제 더 없다’는 말은 절대 거역할 수 없는 명제이다
아이들에게 자유를 최대한 허용하라. 그 자유를 행사하는 데 방해가 될 만한 것이나 파손될 만한 물건들이 있다면 치워놓아라. 아이의 손 닿는 곳에 비싼 물품을 두지 말라. 거울이나 도자기처럼 사치스러운 물건을 놓지 말되 투박하고 튼튼한 가구를 들여놓아라. 이러한 주의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문제를 일으켰다면, 절대 혼내지 말라. 야단치지 말라. 그것 때문에 당신의 기분이 상했다는 내색조차 하지 말라. 마치 가구가 쓰러져 저절로 파손되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하라. 명심하라. 그렇게 보인 인내심만으로도 당신은 엄청난 교육을 한 것이 된다.
관례적인 악습에 물들지 않도록 하라. 이치를 내세워 따지지 말라. 아이의 신체와 감각을 단련시키는 데 힘쓰되 정신만은 한가하도록 내버려둬라. 아이는 판단력이 부족하므로 판단력 이전의 생각들을 경계하라. 너무 일찍부터 선을 가르쳐주려고 서둘지 말라. 천천히 가르쳐라. 늦으면 늦을수록 이득인 줄 알라. 아무것도 훼손됨 없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얻는 것이다. 아이로 하여금 그 안에서 어린 시절이 무르익도록 하라. 교훈이 필요할지라도 꼭 오늘 시행해야 할 사안이 아니라면 가르침을 미루어라.
대책도 없이 교육을 서두른다면 당신은 곧 방향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수전노처럼 한푼도 손해보지 않겠다는 식으로 처신하지 말라. 아이의 어린 시절을 낭비하도록 하라. 장차 그것으로 아이는 더 많은 시간을 벌게 될 것이다. 현명한 의사는 환자의 체질을 알기 전에는 처방을 내리지 않는다. 그는 신중하게 파악하고 환자를 치유한다. 하지만 서두르는 의사는 환자를 죽인다.
시골에서라면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악습들, 주인을 따라다니는 비굴한 하인배들이나 도시의 오염된 풍속들로부터 아이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골 농부들에게서도 악덕은 발견할 수 있지만 거기엔 겉치레도 없고 상스러움 또한 그대로 드러나 있어 아이가 본받을 리도 없다. 유혹적이라기보다는 혐오감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시골에서는 또 아이를 통제하기가 훨씬 자유롭다. 교사의 언행이나 평판에 대해 오해 살 일도 적을 뿐더러 권위를 유지하기에도 유리하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따르고 인정 받으려 할 것이므로 아이에게도 선한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이 정도만 해도 큰 복이다.
당신의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 아이가 좋지 못한 장면을 목격하더라도 당신이 가르치는 악보다는 덜 해롭다. 당신이 좀 더 안답시고 스스로 좋다고 판단한 관념 하나를 주입하기 위해 중언부언하지 말라.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으로 꽉 찬 당신의 관념이 아이에게 제대로 전달될 것이라 자신하는가? 아이가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선생들이여, 가르치는 일에 신중하라. 서두르지 말고 주의해 가르쳐라. 섣불리 선악에 대한 지식을 넣어주려다가 악마의 교사가 되지 않도록 하라. 아이가 집 밖에서 보고 듣는 것을 통제할 수 없다면, 그의 내면에 그런 것들이 적절히 안치되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데만 힘써라.
체험을 통해 얻은 것은 결코 잊지 않는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가르쳐라. 아이는 말로 가르친 것은 쉽게 잊지만 체험을 통해 얻은 교훈은 결코 잊지 않기 때문이다.
절대 화를 내선 안 된다. 아이가 부술 만한 물건들은 치워두되 이미 부쉈다면 서둘러 새 물건으로 교체해주지 말라. 그래서 결핍으로부터 오는 불편함을 겪도록 해야 한다. 아이가 자기 방의 창문을 깨뜨렸다면 그 역시 그대로 두어라. 찬 바람이 들어와도 그대로 두어라. 감기 걸릴 것을 염려해 노심초사할 것도 없다. 아이가 바보로 자라느니보다 감기 걸리는 것이 백배는 더 낫기 때문이다. 아이가 당신을 불편하게 해도 당신이 먼저 문제 삼지 말라. 아이가 먼저 불편을 느끼도록 하라. 그런 다음 당신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유리를 갈아 끼워주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내가 만든 창문이다. 내겐 이 창문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는 아이를 창 없는 방에 가두어라. 아이는 한동안 울며불며 소란을 피울 것이다. 그렇다고 당신의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때가 되면 아이의 마음은 진정되고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마음가짐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때도 당신은 직접 나서서는 안 된다. 누군가를 시켜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알려주고 아이가 그것을 제안하도록 유도하라. 아이에게 자유를 주는 대신 앞으로는 절대 창문을 깨지 않겠다는 조건이 담긴 제안을. 아이는 틀림없이 그 제안을 수용해 당신에게 간청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서둘러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서둘러 요구하는 일도 없게 된다. 빨리 가르치려는 욕심이 아이로 하여금 약속을 남발하게 한다. 아이가 약속에 부담을 느껴 그 중요성을 망각하거나 쓸데없는 헛소리로 간주하게 되는 것 등은 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얻어진 결과물들이다. 그러므로 아이에게 뭔가를 요구할 때는 신중히 하라. 의무를 지울 땐 그 의무에 대해 증오심을 갖지 않도록 주의하라.
적선은 당신의 몫이지 아이의 몫이 아니다. 자비심을 베푸는 일은 당신의 권한일 뿐이다. 적선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지도 못하는 아이는 자비심을 베풀 자격도 없다. 당신이 헌금을 강요한다면 아이는 단지 주머니 속에 있는 금속조각을 내줄 뿐이다. 금속조각의 의미를 아이가 이해하리라고 생각하는가? 아이에게 있어 그 금속조각은 사탕 한 봉지만도 못한 것일 수 있다. 당신의 자녀를 인심 후한 아이로 키웠다고 생각하는가? 그 아이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을 남에게 주도록 권유해보라. 당신은 그 아이의 태도에서 그가 정말 인심이 후한지 어떤지를 알게 될 것
아이에게서 뭔가를 얻으면 곧바로 되갚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받을 만큼만 주는 습관에 젖도록 만드는 것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줄 땐 두 종류의 관대함밖에 없다. 자기에게 필요 없는 것을 주거나 곧 되돌려받으리라고 확신하는 것만 준다.
모방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미덕은 원숭이처럼 흉내만 내는 가식적인 것이다.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선행은 결코 도덕적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아이의 마음이 깨끗한 상태이므로, 분별심을 지니고 선을 행할 수 있기 전까진 그런 행동을 따라하며 습관을 들이는 것도 필요하긴 하다.
가장 숭고한 미덕은 소극적인 것이다. 그래서 어렵다. 그것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며, 자기 만족으로 스스로를 고양시키는 그 유쾌한 즐거움까지도 초월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만큼 타인에게 큰 선행이 어디 있겠는가를!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불굴의 정신과 강인한 성격이 필요하겠는가를!
시간을 아껴야 하므로 서둘러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간을 잘못 사용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시간을 많이 잃는다는 것을 당신은 모르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만일 인생 전체를 유익하게 보내야 한다는 미명하에 잠 한숨 자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아마도 미쳤다고 할 것이다. 그는 시간을 즐기지 않고 그것을 버린다. 아이의 시간도 마찬가지다. 아이의 어린 시절을 이성이 잠자는 시기로 생각하라.
배움에는 반드시 수고가 필요하다.
현실에 대해 아무런 이해력도 갖추지 못한 아이들에게 장래의 행복이라든가 미래의 이익 등에 대해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결국 말뿐인 교육, 말로만 포장하는 교육에 지나지 않는다.
어학이 단순한 어휘 공부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기호가 바뀌면 그에 따른 관념도 바뀐다. 이 관념을 고리로 사상이 형성되고 그 사상은 그 언어의 색채에 물들 수밖에 없다. 아이가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 두 가지 언어가 지니고 있는 관념들을 비교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관념조차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떻게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기호에는 반드시 관념이 따르므로, 무엇인가를 공부한다는 것은 표현되는 것들의 관념을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줄곧 기호만 가르칠 뿐, 그 표현된 기호 속의 관념은 이해시키지 못한다. 아이에게 지리를 가르친다면서 지도 보는 법만을 가르치는 것과 똑같다. 그래서 아이들은 도시도 알고 국가도 알지만 그것들이 지도가 아닌 어딘가에 실재한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미 아는 것이 아니다. 2년 동안 세계지리를 공부한 열 살짜리 아이들 중 과연 파리에서 생드니까지 찾아갈 수 있는 아이가 있을 것 같은가? 나는 없다고 본다.
기억은 책을 통해서만 증진되는 것이 아니다. 공부도 책을 통해서만 하는 것은 아니다.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책이고, 그 책을 통해 아이들은 스스로의 기억을 살찌운다. 기억이라고 부르는 이 기본적인 능력을 강화하는 진정한 기술은 기억해야 할 그 대상을 잘 선택하는 데 달려 있다. 아이가 알아야 할 것들은 지속적으로 보여주되 알지 말아야 할 것은 눈에 띄지 않도록 숨겨야 한다. 이런 식으로 어려서의 교육과 나이 들어서도 평생 이용할 수 있는 지식의 창고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이 방법은 사실 아이를 비범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현명한 사람을 만든다.
서둘러 가르치지 말라는 것이다. 당신의 자녀를 빨리 가르치고 싶은가? 그렇다면 느긋하게 대응하라. 그것이야말로 아이를 가장 빨리 깨우치는 길이다. 에밀이라면 분명 열 살이 되기 전에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가 열다섯 살이 되기까진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읽고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염증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아직 학문을 사랑할 수 없는 아이에게 학문을 싫어하도록 만들지 않아야 한다.
교훈은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것이지 인간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으므로 그 학생은 스스로 더 많이 공부한다. 이렇게 하여 그의 신체와 정신은 동시에 단련된다. 육체가 튼튼해질수록 정신은 훨씬 더 약동한다.
이것이 스파르타인들의 교육법이었다. 그들은 아이들을 책과 가까이 있게 하는 대신 자신의 양식을 훔치는 법부터 가르쳤다. 그렇다고 해서 스파르타인들이 포악한 인간으로 성장했던가? 그들은 언제나 이기도록 훈련됐고 전쟁에선 승리했으며 남들에게 깍듯했다.
교훈은 언제나 사물 그 자체로부터 얻어진다. 그것이 자연의 가르침이다.
도회지 아이들은 열여덟 살이나 돼야 철학반에서 지렛대에 대해 배우지만 농촌의 아이들은 열두 살만 돼도 그 사용법을 훤히 꿰뚫고 있다.
신체의 단련이 곧 그 도구를 튼튼하게 하는 일이다. 고대 이래로 많은 현자들이 이 점에 대해 통찰했다. 몽테뉴는 말했다. “아이의 정신을 강인하게 만들고 싶은가? 그렇다면 근육을 튼튼하게 하라. 노동에 익숙하게 함으로써 고통에도 익숙해지게 하라.” 이 점에 관해선 나도 충분히 얘기한 바 있다. 로크 역시 설파했다. 그의 고찰에 덧붙여 몇 가지만 더 말하고자 한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상을 주면서 그 상품으로 화려한 장신구를 약속한다든가, 가정교사가 벌을 주면서 ‘네가 공부를 하지 않으면 농부의 아이처럼 투박한 옷을 입히겠다’고 위협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마치 아이들에게 ‘인간이란 어떤 옷을 입고 있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인간에겐 두 가지 체질이 있어 어떤 사람은 활달하고 어떤 사람은 얌전하다. 얌전한 사람은 옷을 따뜻하게 입어야 하지만, 활달한 사람은 대기의 변화에 익숙해야 하므로 가볍게 입음으로써 신체를 단련해야 한다.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자연의 순리이며 인간 역시 그렇다.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아 있을 때의 수면은 고요하고 감미롭다. 그러나 태양이 공기를 덥히고 있는 상태에서 인간의 감각은 그다지 평정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수면 습관은 일출과 함께 일어나고 일몰과 함께 자는 것이다. 인간을 비롯해 모든 동물이 여름보다 겨울에 더 많이 잔다는 것은 그런 면에서 자연스럽다.
불편한 잠자리부터 익숙해질 수 있도록 훈련시켜라. 당장에는 고통스러울지 몰라도 습관이 되면 감각이 그것을 받아들여 쾌감 또한 증가하게 마련이다. 안락한 생활은 끝없이 불쾌한 감각만을 가져온다. 애지중지 자란 사람은 포근한 이불에 감싸여야만 잘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데서나 잘 수 있다. 어디서곤 눈만 감을 수 있으면 그는 잔다.
아이를 재우려면 지루하게 만들면 된다. 아이가 입 다물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이야기를 많이 해보라. 아이는 곧 잠들 것이다. 지루한 설교도 때론 쓸 데가 있는 법
상황에 따라 깨워줄 것을 약속하기도 하고 약속하지 않기도 한다. 그가 제시간에 일어나지 않으면 나는 그냥 가버린다. 그리하여 스스로 일어나지 않으면 손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허영심이 우리를 무모하게 만든다. 보는 사람이 없으면 우리는 무모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에밀에겐 허영심이 없도록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온세상 사람이 지켜보고 있다 하더라도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위험한 상황에서만 단련이 되는 것은 아니기에 에밀은 정원의 연못에서도 헬레스폰트 해협을 횡단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험에 처해서도 당황하지 않으려면 위험에 익숙해질 필요는 있다. 이렇게 하여 앞서 말한 불굴의 정신이 길러진다.
가령 맹인들은 보통사람보다 확실히 예민한 촉각을 지니고 있다. 시각의 역할을 대신해야 하기 때문이다. 맹인은 태양이 있든 없든 늘 같지만, 보통의 인간은 어둠 속에서는 늘 불편하다. 태양이 비치는 한 우리가 유리하지만 밤에는 불리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생애의 반을 눈멀어 지낸다. 맹인은 밤이건 낮이건 걸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등불이 있지 않느냐고? 어이없는 일이다. 당신은 그것을 팔다리처럼 늘 몸에 붙이고 다닐 배짱이라도 있단 말인가? 나는 에밀이 촛불에 의지해 사는 것보다 손끝에 눈을 가졌으면 더 좋겠다.
가능한 한 밤에 많이 활동하도록 하라. 인간은 생래적으로 어둠을 두려워한다. 아무리 학식이 많고 용기가 출중해도 이 치명적인 약점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 왜 그럴까? 사람들로 하여금 미신에 빠지게 하고 의심 많게 하는 원인, 즉 무지 때문이다.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할 때 우리는 두렵다. 설령 그 장소가 아무리 안전하다 하더라도 내가 그곳을 보지 못한다면, 나는 왜 그곳이 안전한지를 알지 못한다.
두려움이 나의 상상을 자극해 스스로를 더 불안하게 한다.
어둠이란 본래 침울한 것이므로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도록 해야 한다. 지하 독방 같은 곳에 가두어두면 안 된다. 아이로 하여금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서 웃을 수 있게 하고 나올 때 역시 그렇게 하라.
중요한 것은 밤과 관련된 추억, 즐거운 기억을 많이 갖는 일이다. 그래서 상상력 안에 어린 시절의 놀이가 가득 차 있기만 하다면 밤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고 해도 귀신의 웃음소리로 상상하기보다는 그리운 친구들의 웃음소리로 들을 것이다. 밤은 그에게 유쾌한 기억만 환기시킬 뿐 절대 무섭지 않으리라.
처음 한동안은 다른 아이와 마찬가지로, 이 귀족 꼬마 역시 차지한 상품을 혼자서 독식했다. 하지만 승리에 익숙해지면서는 마음도 너그러워져 경주에 진 아이들과도 과자를 나누어 먹었다. 이를 통해 나는 관용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도덕적 관찰을 할 기회까지 얻게 되었다.
인간에겐 언제나 변하지 않는 자연의 척도가 있다. 보폭이나 팔의 길이, 키 등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도형의 정확성에 대해 소홀히 한 채, 그것이 정확하다는 가정하에 증명하는 일에만 집착하는데, 사실 논증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선과 곡선을 정확히, 제대로 긋는 일이다. 그리하여 가능하면 가장 동그랗게 원을 그릴 줄 알고 반듯하게 정사각형을 그릴 줄 알아야 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대전제를 받아들이자. 아이들 중엔 어른도 할 수 없는 일을 척척 해치우는 신동도 있다. 다른 아이들이라면 펜을 잡기도 힘겨운 나이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아이도 있고, 바이올린을 켜거나 피아노를 치며 음악적 재기를 뽐내는 아이도 있다. 어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들도 할 수 있는데, 다만 어른들은 그들의 공상만으로 아이들을 평가절하하기 일쑤다.
한다는 것이다. 이 놀이는 자연이 요구하는 자발적 운동이여야 하며, 놀이의 즐거움을 배가하기 위한 기술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놀이에 강제성이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말로 설명하지는 말라. 그럴 바에야 차라리 모르고 있는 편이 낫다.
이해하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일에 대해 감동적인 목소리를 내게 하지 말라.
가장 단순한 취향이 가장 자연적인 취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순할수록 빨리 오염되고, 변질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변질돼 습관으로 굳은 이 취향은 관성의 법칙이 그러하듯, 한 가지 방향으로 예민해지고 자극됨으로써 더욱 공고해지게 돼 있다. 그래서 어떤 나라에도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은 어떤 나라의 관습에도 잘 적응한다. 하지만 이미 한 나라에 속해 있는 사람은 다른 나라의 국민이 되기 어렵다.
입맛이 단순할수록 보편적이어서 세계 어디를 가든 잘 적응한다.
고기를 많이 먹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더 무자비하고 사납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일이다. 미개인만 보더라도 그들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풍속 때문이 아니라 음식 때문이다
아이에게 산해진미를 먹이려고 하지 말라. 평범하면서도 단순한 음식만 제공하되 양껏 먹고 마음껏 뛰어놀도록 하라. 그래도 과식하지 않으며 소화불량으로 고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를 굶주리면 얘기는 다르다. 아이는 먹을 것에 집착하게 되어 먹을 수 있는 한 배가 터지도록 먹을 것이다. 이와 같은 무제한의 식욕은 자연이 우리에게 마련해준 위장의 요구 때문이 아니다. 변덕 때문이다. 농부의 아이들을 보라. 빵과 과일이 사방에 널려 있음에도, 어른들이 그런 것처럼 아이들 역시 소화불량이 무엇인지 모르고 산다.
후각은 상상력의 감각이다. 다른 감각에 비해 더 뇌신경을 자극하며 그렇기 때문에 한동안 활기를 띠게 하다가도 곧바로 피곤하게 한다.
기대감도 주지 않을 것이고 아쉬움도 주지 않을 것이다.
기억력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판단력만은 출중하다. 달변가도 아니다. 하지만 말하기에 앞서 행동할 줄 안다.
그를 자유롭게 놔두어라. 그리고 지켜보라. 무슨 행동을 하는지 관찰해보라.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만 할 것이다. 성공하리라는 확신이 있을 때만 행동으로 옮길 것이다. 남에게 모르는 것을 묻기 전에 먼저 조사하고 연구할 것이다. 그는 헛되이 상상하지 않을 것이므로 헛되이 확신하거나 헛되이 낙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침착할 것이다.
대부분의 가정교사들은 학생보다 자신을 먼저 이해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시간 낭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하며, 정당하게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는 그런 측면에 유용한 지식부터 아이에게 주입한다. 어떻게 하면 남의 눈에 잘보일 수 있을까를 연구하면서 잡다한 지식들을 아이의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그런 다음 그것들을 펼쳐 보이며 과시한다.
소년기
가진 힘에 비해 욕구가 크면 클수록 유약해진다. 강해지고 싶은가? 그렇다면 욕망을 줄여라. 욕망을 줄이면 자신이 원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여분의 힘을 가질 수 있다. 이럴 때 그는 강해진다.
인생에서 아주 짧고, 그래서 그만큼 중요하다. 이 시기의 남아도는 힘을 그는 어떻게 사용할까? 무엇을 위해 쓸까? 자기 자신의 미래를 위해 쓸 것이다. 그가 건강한 아이라면 그 힘을 자신의 신체 내부에, 팔과 머리에 저장해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야말로 공부할 시기
인간의 지능에는 한계가 있다. 알고 싶다고 해서 다 알 수가 없다. 알 수 있다 하더라도 선택해서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잘못된 명제에는 그 반대 명제가 있기 마련이므로, 진리의 수만큼 오류의 수도 무한하다. 어떤 지식을 받아들일 것인가를 선택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소수의 현명한 사람만이 그 점에 성공한다. 모든 것을 아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유익한 것만 아는 것이 중요하다.
누가 보잘것없는 지식으로 아이의 주변에 심연을 파는가. 아이를 인도하는 당신이여,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아이를 오류의 그물에 가두지 않도록 주의하고, 길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라. 길을 잃는 것은 무지 때문이 아니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길을 잃는다.
같은 지식욕이라고 해도 박식함을 평가받고 싶어 하는 욕망에 근거한 열정이 있는가 하면, 생래적으로 무엇이든 알고자 하는 호기심에 바탕을 둔 열정이 있다. 호기심에 바탕을 둔 이 열정은 선천적인 것이지만 우리들의 정념과 지식에 비례해서만 발전
사실 이외의 것은 가르치지 말라
자연의 감동이 직접 그의 영혼에 스미도록 하라. 당신이 선생이라면, 절대 말로써 이러한 감동을 전달하려 하지 말라. 어찌 고통 없이 쾌감을 느낄 수가 있겠는가? 황무지를 헤매보지 않고, 사막의 모래에 발바닥을 데어보지 않고 어찌 새벽의 신선한 공기를 맛볼 수 있겠는가? 초원을 걸어보지 않고 어찌 풀의 감촉을 알겠으며, 사랑 없이 어찌 새들의 노랫소리에서 관능적 기쁨을 느낄 수 있겠는가? 아름다움을 모른다면, 어찌 아름다움을 상상하고 아름다운 하루를 시작하겠는가? 아름다움을 쌓아 삶에 감동을 주겠는가?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말로 가르치려 하지 말라. 묘사하지도 말고 장황하게 설명하지도 말라. 명료하고 단순하며 냉정하게 말하라. 이러한 원칙에 따라 아이 스스로 필요한 것을 구하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한 남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도록 하라. 그러한 태도가 몸에 배도록 하라. 그는 새로운 사물이나 현상을 접할 때마다 말없이 그것을 관찰하게 될 것이다. 그는 생각에 잠겨 있기에 질문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적절한 시기에 사물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그뒤 그가 충분히 호기심을 가졌다 싶을 때 간결한 질문을 던져 해결 방법을 모색하도록 하라. 메모 굿 윌 헌팅
틀리면 틀린 대로 방치하라. 잘못을 스스로 교정할 때까지 기다려라. 그가 오류의 샛길로 빠지면 빠질수록 더 많이 배우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가 그린 지도의 정확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릴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느냐에 있기 때문
교육의 핵심은 많은 지식을 주입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의 두뇌 속에 보다 명료한 관념을 심어주는 데 있음을 잊지 말라. 잘못 알고 있을 바에야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편이 낫다. 내가 그의 머릿속에 진리를 넣어주고자 하는 것은, 진리 대신 배울지도 모를 오류로부터 그를 보호해주기 위함이다. 이성이나 판단력은 천천히 다가오지만 편견은 떼를 지어 몰려온다.
학문 그 자체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신이 만일 그런 사람이라면 당신은 끝도 없는 수렁 속에 빠져 절대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지식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은 곧잘 그 사람을 오류에 빠지게 한다. 그것은 마치 바닷가에서 예쁜 조개껍질을 줍는 것과 같아서, 이것을 주웠다 저것을 주웠다 하다가 마침내 지쳐 모든 것을 버리고 빈 손으로 돌아가는 사람과 같다.
질문의 동기를 파악하라
당신을 괴롭히려는 의도가 있는 질문이라면 단호히 물리쳐라. 그의 관심은 배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그의 질문에 복종시키려는 데 있기 때문
인간은 스스로 터득했을 때 가장 명료한 관념을 갖는다. 그래야 그의 이성이 타인의 권위에 종속되지 않는다. 관념을 실질적으로 확장하거나 어떤 기구를 발명하는 데도 그 점이 훨씬 유리하다. 주는 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정신은 무기력에 빠지기 쉽다. 남의 시중을 받기만 하는 사람의 몸이 빨리 쇠약해지는 것처럼.
순수하게 이론적인 지식이 아이들에게는 적절치 않다고 나는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물리학 이론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아이의 어떤 경험이 다른 경험과 손잡게 함으로써 그의 정신 속에 살아 있도록 하라. 필요할 때 그것을 기억해 사용할 수 있도록 질서 있게 배치시켜라. 사실이든 이론이든, 무질서한 상태로 오래 기억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실제 체험을 통해 깨닫게 하라. 나는 산책로에서 돌멩이 하나를 주워 든다. 손바닥을 편다. 돌멩이가 떨어진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에밀에게 묻는다. “왜 이 돌멩이가 떨어졌지?”
그로 인해 일과 놀이를 구분하는 안목이 생긴다. 눈앞의 이익을 추종하던 습관에서 벗어나 아이는 이제 자기가 해야 할 일에 대한 관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세상엔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이는 그 일에 더 열정적으로 접근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선견지명의 효용이다. 여기서 지혜가 생겨난다.
아이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지성을 갖추고 있지 않는 한, 도덕이나 사회적 관습과 관련된 일에 대해 너무 일찍 가르치려 해서는 안 된다. 아이가 전혀 흥미를 갖고 있지 않음에도 그것의 이점이나 당위를 강변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명령과 강요로 아이를 규율하지 말라. 남의 의견에 순종하는 아이로 만들지 말라. 자신이 좋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그에게 좋은 것이란 없는 법이다. 당신은 아이의 이해력보다 앞서 가르침으로써 선견지명을 심어준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오해이다. 그로 인해 아이는 자신의 본성 안에 숨어 있는 그 능력을 활용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는 것을 당신은 알아야 한다. 그렇게 자란 아이는 남의 말을 쉽게 믿고 잘 속는 인간만 될 뿐이다.
당신은 왜 그에게 적합한 교육 대신 미래의 어떤 시기에 소용될지도 모를 교육에 그토록 매달리는가? 그러면 상황에 임박해서 부랴부랴 가르쳐야 하느냐고 당신은 반문할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선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그보다 더 일찍 가르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진정한 선생은 경험과 감각이며, 인간은 자신에게 적합한 것을 자신이 위치한 관계 안에서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디에 유용한가?’
그는 질문이 있어도 이 말의 자문자답을 거친 연후에나 하게 될 것
‘너의 그 질문이 어디에 유용하지?’
유용한 답변이 궁색할 땐 주저없이 ‘네게 해줄 말이 없다는 것’을 밝히든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면 솔직히 그 점을 시인하고 ‘이 문제는 일단 덮어두자’라고 말하라
행동을 통해 이뤄진 교육이 가장 효과적이다
에밀의 마지막 문장, ‘천문학도 쓸 때가 있다’는 말을 그 스스로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평생 이 교훈을 간직하고 살아갈 것이다. 만일 이러한 과정 없이 말로써만 설명해주었다면 그는 다음날 바로 내 이야기를 잊었을 것이다.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교육은 행동을 통해 이루어질 때 가장 효과적이다.
아무리 훌륭한 내용도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이해한다 할지라도 그 내용에 관심이 없거나 자신에게 적합한 것이 아니라면 그는 아무 노력도 기울이지 않을 것
나는 에밀의 발전에 대해서만 기록하여 어제 이룬 것과 오늘 이룬 것을 비교할 것이다. 어제 달린 거리와 오늘 달린 거리를 비교할 것이고, 어제 건너뛴 도랑과 오늘 건너뛴 도랑을 비교할 것이다. 그렇게 질투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서 격려할 것이다. 아이는 이제 자신을 경쟁 상대로 삼아 노력할 텐데, 반드시 그렇게 돼야 한다.
가장 유용한 기술이 가장 적은 소득을 낳는다.
현실적으로는 유용하지 않음에도 높은 가격으로 유통되는 기술이 있다. 소위 말하는 예술가들의 기술이 그 범주에 속한다. 그 사람들은 한가한 부자들을 위해서만 일하기 때문에 임의대로 가격을 매기는 한편, 그 가격이라는 것이 세간의 의견에 의해 결정될 뿐이어서 값이 비쌀수록 그 가치 또한 높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그 물건의 유용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그것을 구입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그렇게 된 것
당신이 철물점에 들어갈 때보다 금은방에 들어갈 때 더 큰 경의를 표한다면, 당신의 학생이 어떤 생각을 갖게 될까? 가치가 유용성에 비례해 결정되지 않는 것을 볼 때, 그는 기술이나 물건의 참된 가치에 대해 오해하지나 않을까? 그의 머릿속에 그러한 관념이 들어서는 순간 당신의 교육은 종말을 고해야 하리라. 당신의 학생 또한 보통의 아이들처럼 되는대로 자라게 될 것
당연하다는 듯이 어리석은 일을 받아들이는 아이가 어찌 어리석은 행동을 알겠는가? 아이를 현명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은가? 그럼 먼저 현명함이 무엇인지 알도록 하라.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구분할 줄 아는 안목을 키워줘라. 그래야만 어떤 생각이 옳은지 판단할 수 있을 것
하지만 자신에 관한 한, 판단은 미숙할지언정 정확하다. 남의 입장은 모르지만 자신의 입장은 잘 안다.
에밀은 세상만사를 평가할 때 그것이 자신에게 유용한지, 안전한지, 행복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등을 잣대 삼아 행한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철이 금보다 더 가치 있으며 유리컵이 다이아몬드보다 더 가치 있다. 보석상보다는 제화공이나 석수장이가 더 존경스럽다. 특히 제빵 기술자는 그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된다. 금은 세공사나 조각사, 도금업자 등은 쓸데없는 놀이나 일삼는 게으름뱅이로 치부될 것이 분명하다. 그는 시계 수리공조차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시간을 즐기고 활용하지만 그 가치는 알지 못한다.
아이는 몰두할 수 있는 일만 해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일에 몰두하기보다는 아이에게 몰두해야만 한다. 아이의 생각을 헤아려 통솔해야 하고, 아이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유용한 일인지를 이해시켜 그 일에 즐겁게 몰두하도록 신경 써야 한다.
한때의 사치를 위해 동원됐을 그 수많은 손길과 희생에 대해, 물질의 낭비에 대해.
그는 속으로 성대한 만찬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수고에 대해 낭비라고 생각할 것이며, 그들이 자신의 즐거움에 대해서는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
부자라고 해서 가난뱅이보다 위가 더 큰 것도 아니고 소화력이 좋은 것도 아니다. 주인이 노예보다 더 힘이 센 것도, 더 긴 팔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신분이 높다고 해서 키가 더 큰 것도 아니다. 자연적인 욕구는 누구에게나 똑같으며 그것을 충족하는 수단 역시 똑같다.
인간의 교육을 자연성에 맞추어 실시하라. 그를 특정의 신분에만 맞추어 교육하게 되면 당신은 그를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운명이 뒤바뀌어 그가 다른 신분으로 전락한다면 그는 어떻게 될 것인가? 거지가 된 귀족이 자신의 혈통적 편견에 사로잡혀 거들먹거린다면 이 얼마나 우습겠는가? 당신은 현재의 사회 질서를 믿고 싶겠지만 그것은 천부의 질서가 아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질서는 인간에 의해 파괴될 수도 있다. 파괴되지 않고 변형되지 않는 것, 그것은 자연이 새겨놓은 것뿐이다. 자연은 부자나 귀족이나 왕을 만든 적이 없다.
왕위를 잃고도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은 왕보다 뛰어난 사람이다. 악인이나 미치광이조차도 오를 수 있는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대신, 소수의 사람만이 오를 수 있는 인간의 지위에 올라섰기 때문 메모 노무현
사회적 인간이라면 누구나 일을 하며 먹고 살아야 한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지 않겠다면? 누구에게도 신세지지 않고 사회 밖에서 살아간다면? 그렇다면 그는 제멋대로 살아도 된다. 하지만 이 가정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사회를 이루고 살게 되어 있으며 남에게 의존해야만 하기 때문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다고 거드름 피우지 말라. 사정이 그렇다면 명예를 위해 일하도록 하라. 신분을 높이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신을 낮추어라. 운명의 지배를 벗어나고 싶다면 독립심을 길러라. 먼저 세상의 여론을 지배하는 일부터 시작하라.
당신이 성공하려면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권력 단체들에게 당신을 홍보하고 잘 보여야 한다. 변변한 후원자라도 얻으려면 동분서주해야 한다. 선생 노릇으로 밥벌이를 하는 일도 만만치는 않다. 적절한 학생을 찾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좋은 추천인을 만나야 하며 그 일은 또 다른 기술을 필요로 한다. 하나의 수단은 자꾸만 다른 수단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 순발력 있게 대응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역경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역경은 당신을 비굴하게 만들 것이고, 실패는 당신에게 교훈을 주기보다는 천하게 만들 것이다. 어느 때보다도 더 세론의 노리개가 된 당신이 편견을 딛고 운명을 개척할 수 있을까? 당신은 부에만 의존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부자들에게까지 의존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의 빈곤이 당신을 노예 상태로 만들지 않겠는가?
당신이 먹고 살기 위해 지식에 매달리는 대신 당신의 손과 그 손을 사용할 수 있는 일에 구원을 요청한다면 그 모든 어려움은 한꺼번에 해결될 것이다. 난관은 사라지고 어떤 술책도 발붙일 데가 없게 된다. 이 수단으로 영위하는 삶에 방해물이란 없다. 명예나 성공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부자들에게 굽실거릴 필요도 없고 생존을 위해 비굴해지거나 거짓말로 남을 속이지 않아도 된다. 당신은 오로지 가고 싶은 길만 가면 된다. 남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아도 생계를 해결할 수 있으므로 얼마든지 정직하고 당당하게 처신할 수 있다. 당신이 부지런하기만 하다면 당신은 한 주일이 가기 전에 다음 주 몫의 빵까지 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시간은 당신 편이다.
세상엔 재능 없는 장인, 특히 예술가들이 수두룩하다. 다른 사람들이 하니까, 혹은 그 일이 존경스러워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맹목적인 열정을 기울인 탓
어떤 일을 좋아하는 것과 어떤 일을 잘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소질을 뛰어넘는 의욕이 주위 사람들을 피곤하게 한다. 한 사람의 재능을 정확히 파악하기란 참으로 어려우며, 아이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선생이라면 아이의 취미와 재능을 확인하기 위해 세심히 관찰해야 한다.
젊은이들이여, 그대의 일에 남성적인 흔적을 남겨라. 건장한 팔로 도끼와 톱을 다룰 수 있도록 배우고, 대들보를 깎아라. 지붕 위에 올라가 용마루를 놓는 법과 버팀목에 이음목을 고정시키는 법을 배워라. 허리에 가죽치마를 두르고 손도끼를 휘두르는 일이 부끄러운가? 그 일이 남루하다고 생각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세론의 노예가 된 것이다. 당신의 아들이 그러한 일을 한다고 해서 낯을 붉히고 수치스러워 한다면 당신은 분명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하지만 아이의 판단에 악영향만 끼치지 않는다면 그 정도쯤의 편견은 양보하기로 하자. 어떤 직업이 유익한지를 알기 위해 모든 일을 다 겪어볼 필요는 없다.
일을 할 때는 겸손하게 처신하자. 허영심을 버려야 한다는 의지가 또 다른 허영심을 낳지 않도록 주의하자. 편견을 극복했다고 으스대는 일은 그 편견에 굴복하는 일이다
작품은 작품 자체로서만 평가되어야 한다. 대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그 작품의 질을 결정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작품이 좋으면 단지 ‘잘 만들었다’고만 말해야지 누가 만든 작품인가를 확인하지 말라.
장인이라는 호칭으로서가 아니라, 작품으로서 장인임을 드러나게 하라.
아이에게 너무 앞선 지식을 가르치지 말라. 지식이 깨달음을 끌고 가게 하지 말고, 깨달음이 지식을 끌고 가게 하라.
쓸모없는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책상이든 의자든 일주일에 한 개씩 만들도록 노력하겠다.
관념이 어떻게 형성되느냐에 따라 인간의 정신이 분류된다. 현실적인 관계에 기초해 형성된 관념은 견실한 정신이다. 표면적인 관계에 만족하는 관념은 피상적인 정신이다. 있는 그대로의 관계를 파악하는 관념은 바른 정신이며, 현실성 없이 상상적인 관계를 만들어내는 관념은 미친 정신이다. 그리고 비교하지 않는 관념은 우매하다.
연은 절대 우리를 속이지 않으며 우리를 속이는 것은 항상 우리 자신이다.
그를 속이는 것은 감각이 아니라 언제나 판단이다. 이 판단의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우리는 경험을 필요로 한다.
꺾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실제로 꺾인 것과의 차이는 아주 크다.
우리는 판단하지 않는 한 결코 틀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식에 의해서보다 무지에 의해 더 행복해질 것이다. 지식인이 더 많은 사실을 알고 있다고? 누가 그것을 부정하겠는가? 그렇다면 지식인이 더 진실에 가까운가? 그렇지 않다. 그는 알면 알수록 진실로부터 더 멀어져가기 때문에 하나의 진실을 알았다고 판단하는 순간 더 많은 오류를 끌어모으게 된다.
판단하지 말라. 그러면 절대 틀릴 일이 없을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가르침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것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미개인에게 있어 멋진 기계의 움직임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자신의 환경에 필요한 것들을 구할 수 있어야 하며 사람들과 어울려 살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는 싫더라도 판단해야 한다. 그에게 정확히 판단하는 법을 가르쳐줘야 할 의무가 여기에 있다.
정확히 판단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우리의 경험을 단순화하는 것이며, 경험하지 않고도 오류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는 일
느리지만 꾸준히 걸어가야 할 학문의 길
우리들이 빠지는 오류의 대부분은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기보다는 타인에게 있기 때문
그는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남이 자신을 생각해주길 원하지도 않는다. 아무에게도 신세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므로 자기 자신만 믿고 따른다. 그에겐 과실도 없고 악습도 없다. 있다면 인간으로서 불가피한 것들뿐이다. 한마디로 그는 건강한 육체와 정신, 그 시기의 자연성에 어울리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청년기
우리들이 지닌 정념의 원천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 즉 자기애
아이가 갖는 최초의 감정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첫번째 감정에서 두번째 감정, 즉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나온다. 이 사랑이 의존을 낳고 이 의존이 확대돼감에 따라 타인을 의식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이때부터 아이는 편애나 질투 같은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것이 이기심의 씨앗
자기애와 달리 이기심은 늘 자기 자신을 남들과 비교한다. 남들보다 더 자신을 아껴줄 것을 요구하는 이 감정은 만족할 줄을 모른다. 그런 연유로 미워하고 화를 잘 내는 정념은 이기심으로부터 오고, 온화하고 애정이 넘치는 정념은 자기애로부터 온다.
자신의 기호에 따라 대상을 선택하는 순간, 지식이나 편견의 힘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그러한 편견 없이, 상대방의 장점이나 아름다움에 대해 별다른 관념을 갖고 있지 않다면, 모든 남자는 모든 여자를 똑같이 볼 것이다. 그의 눈엔 모든 여자가 참하게 보일 것이기 때문에 제일 먼저 만난 여자에게 마음이 끌릴 것이다. 하지만 편견에 의해 대상을 선택하는 순간, 사랑은 자연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그것의 억제나 규제로 흐른다. 사랑에 빠진 어떤 사람이 한 상대방에게만 집착하는 것은 그 때문
이 호기심은 이쪽에서 먼저 유발하지 않으면 생기지 않으므로 실마리를 제공해주지 말아야 한다. 질문해 왔을 때,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되면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대답해주기보다는 그를 침묵하게 하는 편이 더 낫다. 회피하기가 마땅치 않다면, 그래서 대답해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솔직하게 대응하라.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거나 해서 그를 혼란스럽게 하지 말라.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느니 차라리 만족시켜라. 그편이 훨씬 덜 위험하다.
침묵으로 가르칠 자신이 없다면 말로 하되, 정확히 표현하고 단호하게 처신하라. 거짓으로 대응해서는 절대 안 된다. 그것이 거짓으로 판명 나는 순간 당신이 이룬 모든 교육적 성과는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숨길 수 없다면 드러내는 것이 현명하다.
수치심은 악을 알면서 생기는 감정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 아이에게 그런 감정이 생기는 것일까? 수치심과 정숙함에 대한 교육이 역설적으로 그것을 알게 한다. 이 앎이 화재의 진원지이다. 얼굴을 붉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죄인이다. 순수한 사람은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아이의 욕망은 어른과 다르지만, 부도덕한 상황에 빠질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은 절제로써 반성하고, 아이는 청결로써 가르쳐야 한다. 아이에게 순수함을 잃지 않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른들이 솔선수범해서 그 순수성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일이다.
숨기려고 애쓰는 것이야말로 가르치는 것
아이가 위험한 호기심을 갖지 않도록 하라. 아이의 단순함에 걸맞게 꾸밈없이, 솔직하고 간결하게 말하라. 한 점 의혹 없이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투박할지언정 불쾌한 관념을 결합시킴으로써 상상력의 불씨를 조기에 진화하도록 하라.
방탕함에 물들지 않고 자란 아이, 자신의 나이에 어울리도록 교육 받으며 자란 아이는 외롭다. 그 아이는 자기 친구를 개처럼 좋아하고 여동생을 시계처럼 사랑한다. 자기 아닌 인간은 모두 남이며 그들의 행위는 그의 관심을 끌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일이 아닌 한 아무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것은 오류라기보다는 자연에 대한 무지이다
순박하게 자라난 청년은 자연스럽게 길들여진 감정에 충실하다. 어질고 너그러우며 동정심이 많아 친구를 만나면 생기가 돌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측은하게 여긴다. 예민한 그의 감수성은 질풍노도의 불꽃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선한 마음은 잔잔한 호수와 같아서 자신이 저지른 사소한 잘못에도 금방 반응을 일으킨다. 후회와 부끄러움에 가슴 아파하고, 온 힘을 다해 속죄하려 한다. 상대가 잘못했을 때는 간단한 말 한마디로도 그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다. 그는 남을 용서할 때도 속죄할 때의 선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
청년기는 복수나 증오의 시기가 아니다. 연민과 관용의 시기
인간의 허약함이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만든다. 우리의 비참함이 우리를 인간애에 경도되게 한다. 결핍이 애착을 낳고, 타인에 대한 필요가 협력을 낳는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절대적으로 행복할 수가 없다. 신만은 그럴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좀 더 상대적으로 행복할 뿐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홀로’라는 절대 공간에 살면서 만족해한다면 그가 향유하는 것은 무엇일까? 고독과 비참함만이 있을 것이다. 부족하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으며, 사랑하지 않고는 행복할 수도 없다.
자신보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에 대해서는 질투심을 느끼며 그로 인해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동정심의 경우는 차라리 기쁨에 가까운 쾌감을 준다. 일시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 서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은 고통스럽지 않기 때문
마음을 선량하게 가꾸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의 마음이 질투심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라. 사치와 화려함의 세계를 맛보게 하지 말라. 귀족 사회의 겉멋든 세태 속으로 그를 끌고 들어가지 말라. 인간에 대해 알기 전에 그러한 세상을 보여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나이 들어서의 얼굴은 자신의 책임이다
고통에 대한 감정을 지속시키는 것은 기억이다. 그리고 그것을 증폭시키는 것은 상상이다. 이런 연유로 사람들은 짐승의 고통에 대해 더 냉담하다. 짐수레를 끄는 말에 대해 동정심을 갖는 사람은 없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을 핍박해 놓고도 그들이 그 고통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다고 가정함으로써 위안을 얻는다.
가진 자들의 고통은 가진 상황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진 그것을 남용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불행은 동정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 그 불행은 전적으로 그의 탓
없는 자들의 고통은 그 상황에서, 그들을 짓누르는 가혹한 운명으로부터 온다. 어떤 지혜나 덕망도 육체의 굶주림이나 피로를 해소시켜주지는 못한다. 설사 그에게 분별력이 있다 한들 상황이 바뀌지는 않는다.
당신은 그가 부럽다. 당신은 그가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가 괴로워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느끼는 즐거움은 대부분 일시적인 것들이기 십상이다. 그가 궁궐을 거닐고 있는가? 그의 모습을 자세히 보라. 궁궐의 주인과 자신의 아버지를 비교하며 신세를 한탄하는 그가 보이지 않는가? 비교할 때마다 허영심이 불을 질러 그를 고통스럽게 한다. 자신보다 훌륭한 옷차림을 한 젊은이를 보며 괴로워하고 상대적으로 더 낮은 자신의 신분에 대해 불평한다. 마침내 남을 의식하는 눈이 지나쳐 스스로 돋보이려는 의지가 그를 고립시킨다. 잘난 체하며 오만해 보이는 그의 태도에 대해 조롱하고 멸시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단 한 명의 모욕이 열 사람의 갈채를 휘젓고 들어와 그의 가슴에 꽂힌다.
남의 불행에 동정하려면 그것을 알아야 하지만 반드시 그것을 느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괴로움에 대한 경험 때문에 남에 대해 동정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괴로운 처지에서는 자기만을 동정한다.
우리는 겉모습만 보고 행복을 판단하며 엉뚱한 곳에서 그것을 찾는다. 쾌활함이란 종종 모호한 행복감의 표시일 뿐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집에서는 우울하고 잔소리가 많다. 진정으로 만족하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들뜬 감정을 보이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은, 이를테면 평온하다. 그는 자신의 행복을 가슴으로 껴안고 산다. 절제된 기쁨으로 자신을 관리한다. 반면 떠들썩한 즐거움이나 안달하는 욕망, 변덕스런 호기심의 뒤엔 항상 권태가 있다. 그래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때 늘 불편하다. 그의 주관심사는 자신의 정체성을 향해 있지 않고 오로지 남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데만 있다. 앞서 말한 젊은이가 그런 경우이다. 반면 에밀의 얼굴에서는 평정심,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보여주는 순진한 모습만을 떠올리게 된다.
절제되지 않은 정념의 폐해는 언제나 크다.
어린 시절에 깃들 수 있는 악에 과잉반응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한 악을 치유할 수 있는 시기는 자연스레 도래한다. 아이의 교육을 서두르지 말라. 훌륭한 교육의 중요한 원칙 가운데 하나는 모든 것을 가능한 한 늦추라는 것이다. 느려도 좋으니 확실하게 발전하도록 해서, 어른이 되기 전에 청년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나도 남기지 않도록 하라.
아이들의 감각 기관을 통해 흘러나오는 불 같은 열정은 그것 자체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과도하게 통제하지만 않으면 타락할 이유가 없다.
은혜를 베푼 사람은 그 일을 잊을 수 있을지언정, 은혜를 입은 사람은 결코 그 은혜를 잊지 않는다. 당신이 낚시꾼의 마음으로 선행을 베푼 것이 아니라면 그는 당신을 생각하며 언제나 감동한다. 그리고 뜻밖의 기회를 통해 그 은혜를 갚을 때가 온다면 그는 기꺼이 당신을 돕고 감사를 표할 것이다.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말이다. “이제 제 차례가 왔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연의 목소리이다.
인간과 사회는 같이 연구해야 한다. 인간은 사회에 의해, 그리고 사회는 인간에 의해 연구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정치와 윤리는 한 쌍이다. 이 둘을 분리해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어느 쪽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것에도 얽매어 있지 않기 때문
길 좋아하고, 단정적인 자세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좋은 것도 좋지 않게 보며 냉소적이 되어 악에 대해서마저도 무덤덤해질 수 있다. 이 무덤덤한 상태가 어떤 사악함을 교훈적 입장에서 바라보게 하기보다는, 세상이 어차피 그런 식이라면 뭘 해도 소용없을 것이라는 식의 자기 회피 수단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무 일찍 관찰자적 시각을 갖다보면 타인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게 되어 빈정대거나 비방하
역사가의 관점이 공정함과는 거리가 멀어서, 항상 역사의 결함만을 묘사한다는 데 있다.
역사가들은 인간의 좋은 측면보다는 좋지 않은 측면에 주목하게 되고 혁명이나 커다란 사건 같은 이슈에만 초점을 맞추게 마련이다. 역사가는 평온한 국민을 기술하지 않는다. 역사가는 쇠퇴해가는 국민들에 관해서만 기술하기 때문에 역사는 모든 것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
선한 사람들이나 그들의 행동은 곧바로 잊혀질 뿐이며 역사의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은 언제나 악인들의 처세뿐이다. 이것이 역사가 철학과 마찬가지로, 왜 그들은 끊임없이 인류에 대해 중상하고 있는가에 대한 답
역사는 역사가의 관점에 따라 변형되므로 편견의 색채를 띠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들의 무지나 오류가 사실을 늘리거나 축소시킴으로써 실제를 왜곡하는 일은 그 얼마나 많은가? 동일한 대상도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게 마련이다. 그때 우리는 어느 것이 사실인지에 대해 어떻게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인가? 바라보기에 따라 더 많거나 적기도 한 나무들, 왼쪽에 있을 수도 있고 오른쪽에 있을 수도 있는 바위들, 혹은 바람에 의해 치솟는 먼지의 소용돌이 때문에 얼마나 많은 전투의 결과가 바뀌었을 것인가? 그런데도 역사가는 마치 스스로 전장에 있었던 사람처럼 그 전투의 승패에 대해 확신을 갖고 기술한다. 어떤 사실의 원인을 알지 못한 채 결과를 논한다면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그것의 정당성을 무엇으로 담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한 역사에서 어떤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역사가의 판단이다. 당신의 학생이 역사가의 판단에 기대게 하지 말고 스스로 판단하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는 항상 남의 눈으로만 볼 뿐이다.
역사는 종종 과대포장된다는 점도 지적해두어야겠다. 역사는 특정한 시점의 인간을 포착하기 때문에 그 등장인물의 모습을 덧칠하고 때로는 극화시키기까지 한다. 역사서만 봐서는 그 인물의 사적인 면모를 우리는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집에서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가족 관계는 어떠하며 교우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우리는 단지 공인으로서의 겉모습만 볼 수 있을 뿐
인간의 마음을 제대로 알고 연구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삶을 다룬 전기물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한 책에서 주인공은 관찰자(작가)의 눈을 피하기가 어렵다.
사람들은 별로 쓸모도 없는 일에 위엄을 지킨답시고 자기 스스로를 경멸받게 하곤 한다.
자신을 낯선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
아는 것에 대해서만 판단 하도록 하라
위대한 사람들은 자신의 탁월함에 대해 명징한 의식을 갖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장점 속에서도 단점을 보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잘난 척하기보다 부끄러워하며 오만하기보다 겸손하다. 그들은 자신의 재주가 출중함에도 언제나 사려가 깊어 그것을 자랑하지 않는다.
관용과 용서를 통해 가르쳐라
학생을 어린애 취급한다든가,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모든 면에서 자신과 학생을 구분하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런 식으로 학생의 용기를 꺾지 말라. 대신 그의 영혼을 고무시키는 데 온힘을 다 쏟아라. 당신과 당신의 학생은 동등한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그렇게 실행하라. 그래야만 그의 수준이 당신처럼 향상될 것이다. 그럼에도 학생이 당신의 수준에 못 미친다면, 거리낌없이 당신이 내려가라. 당신의 명예는 당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제자에게 있음을 명심
충고할 때도 당신의 의견을 명령하듯이 말해서는 안 된다.
위로나 격려의 힘은 예상외로 크다. 비난해야 마땅할 것 같은 잘못에도 관용과 용서로 그를 대한다면 그 교육의 효과는 깊고도 넓다.
그가 실수했더라도 질책하여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행위를 절대 하지 말라.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훈계는 백해무익
잘못을 되풀이했다 해서 ‘내가 전에 분명히 말한 적이 있을 텐데!’ 하는 식의 어조로 그를 나무라지 말라. 그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신이 그것을 잊어버린 척하는 것
행동하는 법에 대해서는 하나도 가르치지 않으면서 그처럼 쓸데없는 교육에만 힘을 쏟는 것은 대체 어떤 철학이란 말인가?
마치 우리의 일생을 별 쓸모도 없는 주제들에 관해 토론이나 하면서 보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거기엔 사는 법에 대한 가르침이 빠져 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써 청년을 가르치라는 것, 그리고 경험으로 가르칠 수 있는 것을 책을 통해 배우지 않도록 하라는 것
수사학에 관한 모든 교육은 그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적절히 활용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단지 말장난에 불과할 따름
학생이 휴가를 얻어내려면 선생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훨씬 더 유용
자기 자신만 아는 사람들, 자기의 일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만물에 대해 공정한 판단을 하지 못한다. 이해 관계에 따라 자신의 관점에서만 선악을 규정하므로 늘 편견에 가득 차 있으며,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이 생기면 당장 지구가 멸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이익을 개인 안에 가두지 말고 일반화시켜라.
현명한 사람은 늘 최대 다수의 행복에 기여하기를 원한다. 그 행복이 어떤 개인에게 돌아가든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인류의 일원일 뿐 개인의 일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 보고 느낀 것 외에 어떠한 권위에 의해서도 지배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자연적인 정신의 발달은 결코 퇴행하지 않는다.
성인을 지도할 때는 아이와는 반대로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성에 관한 비밀들? 주저하지 말고 가르쳐라. 결국 알아야 할 것들을 타인에게서 배우게 하지 말고 당신에게서 배우게 하라. 본능이 발달하고 있는 기미가 보이면 조금이라도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서둘러라. 그렇지 않으면 그는 선생의 의지와 무관하게 모든 것을 알아버리고 말 것이다.
이성적인 귀가 열려 있다고는 하나 이치를 따져 설교하지 말라. 먼저 그가 당신의 얘기를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대부분의 얘기가 무익하게 결론 나는 것은 학생의 과오 때문이 아니라 선생의 과오 때문이다. 현학자나 선생은 비슷한 얘기를 한다. 하지만 현학자는 아무 때나 얘기하는 반면 선생은 그것의 효과를 확신할 때만 얘기한다.
같은 장소도 목적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그것이 자연이며, 그에 따른 즐거움의 선택 만큼 다양한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 자연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시켜보라. 그 일에 빠져 나머지 일은 다 잊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잘못 가운데 하나는 인간이 너무 정신에만 신경을 써 이성을 남용한다는 것
말의 인상은 약하다. 사람들은 귀보다 눈을 통해 더 마음에 호소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모든 것을 이성에 의지하려고 함으로써 교훈을 언어화했고 그로 인해 행동은 뒷전이 됐다. 이성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추론만 일삼는 것은 소인배들의 버릇이다. 정말 굳센 영혼은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그 언어이다.
백성은 더 이상 왕을 존경하지 않으며 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만 복종한다.
젊은이들과는 말싸움을 하지 말라. 그들의 이성에 호소하고 싶다면 그 이성에 옷을 입혀라. 당신의 언어를 마음에 스며들도록 하라. 논쟁은 견해를 확정할 수는 있지만 행동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긴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나는 장황하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이성은 엄숙하겠지만 나의 마음은 그런 식으로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이익과 손실에 앞서 나의 이익과 손실을 얘기함으로써 그의 영혼을 편협함에 빠지지 않도록 할 것이다. 그는 감동할 것이고 나의 우정과 관용에 공감해 나의 가슴을 끌어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너는 나의 작품이다. 너는 나의 보물이며 아들이다.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므로, 너는 불행해져서는 안 된다. 네가 잘못된다면 너는 내 20년의 생애를 빼앗아가는 것과 같다. 뿐만 아니라 나의 노년 또한 불행해질 것이다.”
맹목적인 복종과 무분별한 약속을 경계하도록 충고하라. 여유를 갖고 생각해볼 기회를 갖도록 하라. 가장 약속을 잘 지키는 자는 가장 나중에 약속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
에밀의 성향을 억압하는 대신 그것을 지배하기 위해 그것에 대해 충분히 알아볼 것이다. 그리하여 가능한 한 행복하도록 돌볼 것이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도록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본능을 부정하는 우울한 가르침으로 그를 기만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사랑을 가르칠 것이다. 진정한 마음과 마음의 결합이 얼마나 우아한 매력을 낳는지 느끼게 해줌으로써 방탕함에 대해 혐오감을 갖도록 할 것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란 없다.
청년의 탈선을 부추기는 것은 그의 관능이나 기질 때문이라기보다는 대부분 세론 때문이다. 그 시기의 젊은이들은 홀로 방탕해지지 않는다. 대부분 또래들과 어울려 타락의 늪으로 빠진다. 그때 도덕적인 설교는 곧잘 유치한 공자 말씀으로 치부된다. 그는 동료들과의 의리 때문에, 혹은 체면 때문에, 혹은 조롱당하지 않을까 두려워 자신의 몸을 대담하게 내던진다. 방탕해질 줄도 모르면서 방탕해지는 그 마음의 밑바닥에 허영심이 있다. 그는 자신의 기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기호에 따라 행동한다. 유혹은 허영심의 문을 통해 들어온다.
소인배 기질을 지닌 선생들의 공통점은, 학생들 앞에서, 스스로가 완벽한 인간인 것처럼 보이도록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 행동은 진실하지도 않거니와 현명한 방식도 아니다. 권위를 확고히 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권위를 잃는다.
인간의 마음에 호소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줘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왜 모른단 말인가? 완벽함에서 어떤 감동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의 학생에게 당신의 약점을 보여줘라. 그와 같은 갈등을 당신도 겪고 있음을 알게 하라.
사회에 첫발을 딛는 그의 출발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을 것이다. 별로 눈에 띄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야 한다. 나는 그가 군계일학처럼 빛나 불행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하긴 그는 첫눈에 사람을 혹하게 하는 그런 매력을 지닌 인물이 아니다. 그는 겸손하지도 거만하지도, 자신을 가장하지도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좋아한다. 그렇다고 남들에게 무관심하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예의범절에 관한 교육을 체계적으로 배운 법이 없어 행동이 뻣뻣할지는 모르지만 남들을 세심히 배려한다. 고통 받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하기에 기꺼이 도와준다. 그는 논쟁을 좋아하지 않으며 반박을 일삼지도 않는다. 행복에 대한 감식안을 아직 갖추지 못한 그로서는 상대방을 논박하느니 보다는, 차라리 그 상대방이 세론에 안주해 행복해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는 필요한 말만 할 뿐 수다스럽지 않다. 세상 만물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이 얘기할 수가 없다. 사람들이 기울이는 관심, 즉 자기에 대한 관심과 자기 말에 대한 관심을 정확히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은 무엇이든 얘기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에밀은 남과 대립하기보다는 기꺼이 순응하여 어울린다. 남의 눈에 띄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는 주목 받는 것을 불편해한다. 그렇다고 소심하다거나 남의 이목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소신껏 행동하며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 그러면서 남들의 관습을 관찰해 잘 파악한다. 그것에 익숙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관습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침작한 태도를 거만하거나 불손한 것으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신을 가장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공손하기보다는 애정이 넘치는 사람이 될 것이며 천 번의 칭찬보다는 한 번의 포옹에 더 감격할 것이다. 몸치장에 신경을 쓸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멋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자기가 하는 일에 있어서는 최고가 되기 위해 성심을 다할 것이다. 달리기를 할 때는 가장 빨리 달리려고 할 것이며, 싸움을 한다 해도 절대 지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그는 세상에서 가장 능숙하고 솜씨 좋은 장인이 되기를 원할 것이다. 그의 명예욕은 그 정도일 뿐이어서, 더 이상의 욕심으로 그 자신을 괴롭히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더 유식하다든지, 더 돈이 많다든지, 더 존경 받는다든지 하는 등등의 일에 그는 무관심할 것이다.
성년기
겉보기에는 강한 쪽이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약한 쪽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한 가벼운 처신에 의한 것도 아니며, 보호자로서의 오만한 관용에 의한 것도 아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굴복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연약함 때문인지, 아니면 자진해서 몸을 맡기는 것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그 점에서 여자의 마음은 완벽히 그녀의 육체에 상응한다. 여자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가벼운 물건조차도 힘에 겨운 척한다. 왜 그런가? 단지 연약해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훨씬 더 교묘한 대비에 의해서이다. 필요할 경우 여자는 자신이 약자라는 변명과 권리를 사용할 수 있도록 미리부터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두 성은 권리나 의무에 있어 불평등하다고 불만을 제기하는 여자가 있다면, 그 태도는 옳지 못하다. 그 불평등은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편견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이성의 소산이다. 여자는 자연으로부터 아이의 양육이라는 책임을 부여받은 만큼 그 아이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물론 남편도 그러한 아내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해야 하며 그 의무를 게을리하는 남자는 모두 야만적이다.
남자가 여자처럼 되려 한다거나 여자가 남자처럼 되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득보다 실이 많지 않겠는가? 인간의 두 성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이지 극복해야 할 관계가 아니기 때문
현명한 어머니라면, 딸을 여자로 만드는 데 힘써야 한다. 그렇다고 집에서 살림만 하도록 가르치라는 말은 아니다. 그녀 역시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외모를 가꾸듯 정신을 연마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보완해 남자를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자연이 그녀에게 준 무기이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다 배우기보다는 여자가 알아야 할 것만을 배워야 한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위해 태어났지만 두 성 간의 관계는 조금 다르다. 남자는 욕망 때문에 여자에게 의존하고 있으나 여자는 그 욕망과 필요 때문에 남자에게 의존하고 있다. 남자는 여자 없이 살아갈 수 있지만 여자는 남자 없이 살아가기 어렵다.
사내아이의 기질이나 품성은 절대적으로 어머니의 영향을 받게 돼 있다. 뿐만 아니라 남자의 품성이나 정열, 취미, 기쁨, 그리고 행복까지도 여자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여자의 교육은 모두 남자와 관련된 것이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남자가 즐거울 수 있는지, 평화롭고 화목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하면 남자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지 등등에 관해 어려서부터 교육받아야 한다. 이 원칙의 토대를 벗어나 가르쳐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여자 자신의 행복뿐 아니라 남자의 행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무 남자든, 마음에 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아니다. 경박하거나 어리석은 소인배의 마음에 들어서는 안 되고 진실로 사랑스러운 남자, 성실하고 재능 있는 남자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경박한 남자를 따르는 것은 자신의 천성을 버리는 것이다. 어리석은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는 어리석음에 틀림없다. 그런 남자를 유혹하려는 욕망은 그녀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취향의 여자는, 설령 경박하지 않은 남자라고 할지라도 서둘러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의 경박함은 여자의 산물이다.
자연을 거스르거나 속박하는 모든 취미는 악습일 뿐이다. 그것은 정신적인 면이나 신체적인 면에서 동일하게 진실이다. 아름다움은 건강함에서 나오는 것이지 결코 쇠약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여자는 화장을 함으로써 자신을 돋보이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치장이나 장식으로는 진정하게 사람의 마음을 끌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은 언제나 존재 그 자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치장한 장신구는 하나의 장식품일 뿐이다.
어른들은 때때로 여자아이에게 상으로 장신구를 약속함으로써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을 갖게 만든다. 장식품은 결점을 감추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스스로 빛나는 것임을 사람들은 왜 모를까?
사치스러운 장식은 허영과 편견의 산물일 뿐이다. 그림을 전혀 그릴 줄 모르는 사람만이 화려하게 그린다. 화려한 장식은 그 이면의 추악함을 드러내줄 뿐이다.
남자아이와 마찬가지로, 여자아이에게도 그 나이에 맞는 즐거움이 있다. 그녀에게 할머니처럼 살기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 연령에 맞는 활달함과 쾌활함으로 천진난만하게 춤추고 노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녀는 자신의 매력을 뽐내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감추는데, 그럼으로써 그것을 상상하도록 한다.
소피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라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친절하고 견실하며, 정직한 열정으로 세상을 살아갈 남자, 그런 남자가 아니라면 차라리 독신으로 생을 마감하리라고 결심했다.
여자의 명예는 남자의 명예와는 아주 다르단다. 여자의 명예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알아야지.
재산을 없앰으로써 목적을 이루려 하지 말고 새로운 재산을 보여줌으로써 그녀를 사로잡을 생각을 해. 네 머릿속에 들어 있는 보석, 그 어떤 재산보다도 가치 있는 재물을 보여줌으로써 말이야. 물론 그 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지. 영혼이 지닌 고귀한 보물의 힘으로 그녀의 저항을 극복하도록 해봐. 크고 넓은 사랑으로 그녀를 감싸 안도록 해. 일시적 열정이 아닌 한결같은 사랑으로 그녀와 그녀의 가족을 보살피고 섬기면 돼. 그래서 그것이 무너지지 않는 원칙의 결과임을 그녀에게 증명해보렴.”
“어머니, 그렇지가 않아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약속을 깨서는 안 되죠. 저는 마음만 먹으면 에밀이 얼마든지 자리를 비울 수 있다는 것도 알아요. 그로 인한 손해를 돈으로 보상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돈에 굴복당하는 것이고, 돈으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위험한 생각에 빠지게 되는 일이죠. 저는 에밀이 그런 사고방식에 젖어 있지 않았으면 해요. 어머니는 지금 그의 마음이 편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보다도 고통스러울 거예요. 그가 자신의 근무시간을 지키며 일하는 것은 모두 다 저를 위해서예요, 어머니.”
하지만 행복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지만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다 가는 사람은 별로 없어. 대부분 그것을 갈망하다가 죽지. 에밀! 네가 태어났을 때, 난 너를 꼭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맹세했다. 네 행복을 위해 내 일생을 바치겠다고 말이야. 그래서 네가 행복해지면 나 역시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지. 그것을 마음에 새겼고 그 각오에 따라 방법을 모색했어. 그러나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지혜로울 수 있어.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지를 모를 땐 말이야.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것을 찾아 헤매다가는 자칫 행복으로부터 더 멀어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 사람들은 무익하게 있기보다는 행복을 추구하며 자신을 속이는 편을 택하지. 그러므로 행복의 지도를 잘못 읽으면 그곳을 찾아가기가 더욱 힘들어져. 나는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자연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걸어왔어. 결국 행복의 길과 자연의 길이 한 가지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내가 제대로 걸어온 것일까? 훗날 너는 알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혹여 네가 나의 심판자가 된다면 나는 너의 그 판정을 달게 받겠다. 자부심을 가지고 내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너는 행복에 필요한 조건들을 모두 갖추었다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너의 영혼을 보호했다지만 그것이 완벽할 리는 없다. 네게 이제 새로운 적이 나타났으며 그 적을 나는 어찌 할 도리가 없어. 그 적은 바로 네 자신이기 때문이지. 이제껏 너의 자유로운 영혼은 모든 것을 겪어왔어. 가난이나 육체적 고통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지. 하지만 네가 모르는 마음의 고통이 지금 너를 옭아매고 있어. 너는 네 굴레에 묶여 있지. 네 욕망의 노예가 되어 너도 모르는 사이에 공격받고 있어. 너는 병들지 않았음에도 아플 수 있고, 죽지 않았음에도 무덤 속의 고통에 시달릴 수 있지. 하나의 거짓말이나 하나의 과오, 하나의 의혹이 너를 절망에 빠지게 할 수 있어. 너는 이제 존재의 고뇌로 인해 미친 듯이 몸부림치는 연극 무대의 주인공이 된 거야.
에밀, 그러니 이제 네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통제할 때가 왔다. 인간의 고통은 결핍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집착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을 거야. 욕망을 충족하면 할수록 결핍은 더 커지지. 집착하면 할수록 고통도 증가해. 그러니 욕망의 문제는, 해결을 통해서가 아니라 해소를 통해 극복해야만 해. 인간? 너는 인간이 언제까지나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니? 그렇지 않지. 모든 존재는 유한한 만큼 언젠가는 우리 곁을 떠나게 돼 있어. 그런데도 마치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애착을 갖지.
정념에 지배당하는 한 너는 항상 불안하고 가엾은 인간이 될 뿐이야. 정념의 법칙이 너의 율법이 되는 순간 너의 자유는 없어. 너의 이성도 없어. 이성이 없으니 똑바로 마주 대할 수도 없지. 그것을 가리켜 미덕이 없어진 상태라고 말하지. 인간의 삶에서 미덕을 빼버린다면, 그러한 삶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야. 나의 에밀, 용기 없이는 행복할 수 없고, 자신과의 싸움 없이는 미덕을 지닐 수 없어. 미덕은 힘에서 나오는 거야. 힘이 미덕의 바탕이지. 미덕은 성품에서는 유연한 자의 몫이지만 의지에서는 강한 자의 몫이야. 우리는 신을 선한 존재로 그리기는 하지만 덕 있는 존재로 그리지는 않지. 신은 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야.
인간을 이해해라. 인간의 한계에 대해 연구해보아라. 그 한계를 이해하기만 하면, 그 한계가 넓든 좁든 불행에 빠지지 않는다. 사람이 불행해지는 것은 그 한계를 넘어서려 할 때이지. 가능하지도 않은 것을 가능한 것처럼 생각할 때 불행해져.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면 자유로워지지. 기대하지 않으면 번민 또한 없기 때문이야. 오만으로부터 오는 환상을 경계하도록 해. 진정한 현자는 늘 겸손하지. 왜냐하면 그는 삶의 덧없음에 대해 늘 관조하기 때문이야. 없는 것을 찾으려 하지 말고, 가지고 있는 것을 더 잘 소유하는 데 우선 힘을 사용하도록 해. 원하는 게 적으면 더 쉽게 부유해질 수 있지. 모든 것이 소멸과 생성을 거듭하는 이 지상에서 영원한 구속의 끈을 매듭지어 무엇하겠는가?
현명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사라지지 않을 아름다움 외에는 집착하지 말아라. 네게 주어진 조건 안으로 네 욕망을 국한시켜라.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할 일을 먼저 하라. 필연의 법칙을 도덕률로 삼아 집착하지 않도록 하라. 잃는 법을 배워라. 삶을 관조함으로써 초월하는 법을 배워라. 역경 속에서도 견디는 법과 의무에 충실히 하는 법을 배워라. 그러면 너는 운명에 지배당하지 않을 것이며 행복할 것이다. 욕망의 파도에 아랑곳없이 평화로울 것이다. 부서지기 쉬운 것을 갖고 있을지언정 깨지지 않을 것이며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음에도 풍족할 것이다. 세론에 지배받지 않는 너는 언제까지나 자유로울 것이다. 에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는지, 삶이 끝나는 순간 존재하기를 그친다고 생각하는지 너는 아니? 집착의 굴레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는지를? 하지만 삶의 덧없음을 아는 너는, 죽는 순간 다시 존재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죽음은 악인에게 있어서는 삶의 끝인지 모르지만, 올바른 사람에게 있어서는 시작인 셈이지.”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려면 오로지 한 가지, 자유를 잘 규제하기만 하면 된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에 대한 규칙만으로 아이를 가르칠 자신이 없는 사람은 교육에서 손을 떼야 한다. 이 두 영역을 확장하거나 축소하면서 아이를 가르쳐라. 아이를 밀든 당기든 이 필연의 끈을 통해서만 제어하라. 그러면 아이는 불평을 늘어놓지 않을 것이다. 사물의 힘만으로 아이를 통제하므로 어떤 악도 싹트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념은 그것이 효과를 거두지 않는 한 자극받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도를 남의 도움 없이 행동으로 옮겼을 때만이, 진정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한 것이 된다. 그런 점에서 최고의 행복은 권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에 있다.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만 하되, 하고 싶은 일만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나의 원칙이며 교육에 접목시켜야 할 핵심이다.
#2
나는 성인이 된 후 부터 결혼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저 결혼을 해야 할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나는 연애 경험이 없거나, 이성에 대한 환상과 의미없는 공격성 따위를 가지고 있는 비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아니며, 동시에 사리 분별이 가능한 나이에 접어든 이후 결혼에 대한 편견이 생길 만한 환경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음을 밝힌다. 본인은 성장하며 넘치진 못했어도 충분히 누릴 것들을 누렸고, 가정도 충분히 화목했고, 이성 관계도 원만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오며 스스로 자각한건 굳이 결혼해야 할 이유가 없더란 거다. 그저 맹목적으로 사랑을 쫓아서 그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서 결혼을 한다는 건 사실 2017년 지금을 살아가는 요즘 것인 나에겐 절대로 피해야 할 선택이라 생각한다. 둘이 결혼해서 아등바등 살아가고, 아기를 낳아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돈 버는 기계가 되어 살아가는 삶은 사실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힌다. (단지 내 생각일 뿐이다. 나는 내 아버지와 세상의 모든 아버지를 존경한다.)
난 그런 삶을 살아갈 바에야 그냥 혼자 조금(아니 훨씬) 더 좋은 삶을 누리면서, 내가 경험하고 싶은 것들과, 나누고 싶은 것들을 베풀며 살아가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난 성격상 뭔가 잔뜩 있는걸 아주 싫어 하기(아 돈은 빼고) 때문에 물욕이 별로 없고, 꼭 필요한 건 현재로써는 모두 가지고 있으며, 철저하게 가지고 싶은 것과 필요한 것을 구분하는 소비를 하므로 금전적인 리스크도 굉장히 낮은 편에 속하는 유형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결혼을 하게 된다면 아기는 절대로 낳지 않을 생각이다. 정말 결혼을 했다면 둘이서 행복하고 알콩달콩하게 조금 더 누리며 살겠다. 최소한 내가 살아가는 세기의 대한민국에서의 새 생명은 축복인지 아니면 그저 노동력 보충수단인지 구분이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내 것을 무척 아낀다. 그렇기에 자식이 고통받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내 자식에게 제대로 해줄 수 없을 바에야 그를 태어나게 한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굉장히 답답하기에 그에게 이런 국가와 답답한 이런 기분들을 알게 하고 싶지 않다. 쉽게 말해 나는 그를 금수저로 만들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굉장히 미워 보이는 위의 모든 단락은 사실 에밀을 읽기 전까지 내가 가졌던 결혼과 출산에 대한 생각이었다. 조금 더 부드럽게 풀어나가고 싶었지만 저게 솔직한 내 생각이었던 지라 그냥 가감 없이 썼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내가 '에밀'이라는 책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어떤 책을 한번 읽어볼까 기웃기웃하다가 표지에 구미가 당겼다. 귀여운 소년이 싱긋 웃고 있는 모습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렇게 서문을 읽고, 첫 페이지를 넘기고 에밀은 나를 매료시켰다.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내 정식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던 저자 '장 자크 루소'가 멀리서나마 관찰자의 시점으로 지켜보고 저술한 일종의 교육서이자 다른 가정교사들의 교수법을 정면으로 들이받은 책이 바로 에밀이다. 그는 교육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가상의 인물인 에밀을 만들어 냈으며, 그의 유년기부터, 결혼 직전까지의 성장 과정과 그 시기의 어떤 교육을 하였는지에 대한 책이다.
결론부터 말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고 수년간 가져왔던 결혼과 출산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 출산은커녕 결혼에 대한 당위성 자체에 의문을 품던 내가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난 여지껏 난 자식을 낳아 기른다는 걸 상상해본적도 없고, 만약 낳아도 제대로 기를 자신이 없었다. 물질적인 부분을 떠나 도대체 그 맑고 깨끗한 영혼에 무얼 가르쳐 줘야 하고, 어떤 경험을 주어야 하며, 또 어떻게 해야 최소한 좋은 인성을 가진 아이로 기를 수 있을지에 해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이런 세상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바가 더욱 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만약에 결혼을 하고 와이프가 임신을 하게 된다면, 나는 최소한 한달에 한번 이상은 에밀을 읽을 생각이다. 시대적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무조건 맹신하고 접목시킬 순 없다. 하지만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바르게 인도하고, 어떻게 해야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지는 이 책을 통해 제대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기르는 것이 인간답게 기르는 것인가?' 이 물음의 답을 찾아가는게 에밀을 교육하는 '장 자크 루소'와 '나'의 공통적인 지향점이다.
자녀 교육의 근본을 바로 세우고 싶다면 나는 에밀을 읽으라 권하고 싶다. 수많은 책과 고전을 읽으면서 이 정도의 통찰력과 안목을 보여준 사람은 장자크 루소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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