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의 일본과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닥터 노구찌'를 보며 어찌 지금의 대한민국의 현실을 이렇게도 빼다 박았는지, 보면서도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 속에서의 묘사들이 지금의 한국사회와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족벌, 학연, 지연. 소위 말하는 SNU를 나온 엘리트 집단들이 나라를 제대로 이끌지는 못할망정 이리떼(E li te)가 되어 가는 곳마다 서민의 피와 살 그리고 나라 구석구석을 뜯어먹기 바쁜 지금의 현실과 너무나 닮아있었다. 어찌 우리는 과거에서 배우지 못하고 이렇게 오랜 시간 발전 없이 정체해 있는 것인가?
이와 동시에 저 때로 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 일본의 현재는 어떤가? 최근 일본 국민은 한국의 촛불시위를 굉장히 미개한 행위라 칭하며 한국 국민을 비아냥대고 있는데 그걸 보면 아직도 정부의 선동에나 이끌려 다니는 부족한 민족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본뿐 아니라 세계가 한국의 촛불시위를 경계하고 비판하는 것은 각 나라 지도층과 기득권이 두려움에서 벌인 선동으로 인해 잘못된 관념을 심은 것이지 결코 우리 국민이 틀렸다고 말할 순 없기 때문이다. 즉 그들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정체국(停滯國)의 정체국민(停滯國民)이다.
요즘 들어 늘 이런 생각을 자주한다. 비겁한 변명일 뿐이지만 내가 훨씬 더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어땠을까?, 내가 다른 꿈을 꾸었으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조금 더 큰 사람이 되어서 국익에 도움이 되는 인물이 될 수 있었을까? 소신 있게 제대로 바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과연 나라면 대통령이라는 자리에서 오롯이 국익만을 위할 수 있었을까?, 내가 기득권이라면 그들 사이에서 입바른 소리를 던질 수 있었을까? 나는 진짜 넓고 큰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대학 시절 학점 커트라인이 있는 작은 동아리 활동을 한 적이 있다. 그 당시 교수님과 부교수님들, 그리고 학생 비율이 1:2 정도로 굉장히 소수정예 집단이었으며(교수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파격적으로, 철저히 비밀리에 소집되어 발족한 동아리였다. 동아리는 학년별로 재능이 있고 학점 커트라인이 높은 소수의 학생만 교수님 추천으로 가입할 수 있었으며 이들을 모아 최대의 실적을 올리는 것이 동아리의 취지였다.
내가 다닌 학부엔 학과간의 다툼이 치열했는데 野에 속한 교수님이 與에 속한 교수님의 동아리 집단을 탐탁치 못하게 여겨 생긴 오랜 계획의 실행이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난 그 동아리 집단의 4명의 회장중 한명이었다.) 기회가 좋았고, 잘하면 레쥬메에 여러 줄 적을 거리가 생기며, 다른 학생들에 비해 선택받았다는 우월감에 취해 동아리 활동을 망설임 없이 결심했었다. 그리고 첫 모임이 있던 날, 피티와 함께 본인을 PR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했던 발표가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초등학교때부터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 꿈은 아직 유효하다.
하지만 나는 내 실력과 재능의 한계를 알고 있다. 현실 또한 알고있다.
나는 필드에 나가 누구보다 뛰어난 디자이너가 될 것이지만,
나는 내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있으며, 내가 가진 결함에 의해 결코 탑이 되진 못한거라 생각한다.
내 디자인은 자유로움을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고, 그것은 내 천성이니 고치려 해봐도 고치기가 너무 힘이 든다.
그렇기에 평생을 디자이너로 살아갈 마음은 없다. 디자이너가 되어 입지를 탄탄히 다진 뒤
언젠가 현실적인 처우에서 힘들어하는 디자이너들의 복지와 처우개선에 힘씀과 동시에
대한민국을 디자인 강국으로 만드는데 이바지 할 수 있는 조력자가 되고싶다.'
단 한 장의 피티나 발표문 없이 그냥 일어나서 이야기했다. 나름의 파격이었고, 그게 내 날것 그대로의 내 생각을 말하고 나를 각인시키는데 더 효과적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클래스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발표 후 후배들은 피티 한 장 준비 안 한 나를 보며 경악했고, 선배들은 이젠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늘 내 편이었다.) 그리고 교수님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내 행동이 옳다 그르다를 말할 수 없지만,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 생각하셨는지, 그 이후 대우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이후 나와 교수님들 사이에 신경전이 오갔고, 결과적으로 나는 반강제적으로 동아리에서 나오게 되었으며, 내가 나옴과 동시에 상당수의 후배와 모든 선배가 동아리를 탈퇴했다. (이 과정에서 나의 영향은 없었다. 그들은 성인이었고 제대로 판단할만한 친구들이었다. 단지 그들 또한 그 과정을 지켜보고 겪으며 굉장히 지친 상태였다.) 단순한 발표에서 시작된 해프닝이 동아리를 와해시킨 것이다. (하지만 후배들만 다시 뽑아 재발족 되었음)
그 사건 이후 나는 관련 교수님이 계신 모든 클래스에서 철저하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모든 발표와 컨펌에서 늘 순번이 끝으로 밀렸고 클래스 단위로 뽑는 모든 공모에서 탈락했다. 나는 내 주변 친구들과 교수님이 찍소리도 못하게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고, 다행히 관련된 모든 수업에서 A+은 놓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난 형용하기 어려운 분노와 스트레스를 겪었으며, 대학 시절 딱 한 번 처음이자 끝으로 클래스를 결석하고 작은 절에 가서 합장을 하며 마음의 짐과 분노를 내려놓고 내려왔던 그 시점이었다.(클래스도 과제물 제출이 끝나서 출석을 인정 해줄테니 몇 주간 나오지 말라고 한 상황이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면서까지 이렇게 긴 글을 쓴 이유는 어떻게 보면 저것이 내가 특정 자리에 올랐을 때 내 행동을 유추 할 수 있는 행동의 떡잎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최고만 뽑는다는 동아리에 뽑혀서 우쭐댔고, 티를 내진 않았지만, 타인보다 우월하다 느끼면서 오만했으며 내 커리어를 채울 욕심을 냈던 내 행동이 부끄럽다. 나는 그것이 남들보다 뛰어날 수 있다고 믿는 야망인 줄 알았지만, 그것은 남들보다 뛰어나다 생각하는 오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내 잣대만으로 전체를 판단하고 행동하여, 전체를 와해시킨 시발점이 된 부분에 대해서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한다. 단지 내 생각에 대한 확신만으로 가장 기본적인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예의를 놓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소신은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는데, 소신이라 생각했던 행동이 젊은 날의 객기가 되어버렸음이 부끄럽다.
나는 저 사건 이후로 다시는 소수로 짝을 이뤄 무언가를 한다든가 하는 파벌이라 할 수 있는 행위를 일절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철저하게 사람을 가리고 가벼울 사람과는 가볍게 지내고, 깊을 사람에겐 깊었던 마음을 버리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행동했다. '닥터 노구찌'에는 뒤를 돌아보며 사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대사가 나온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앞을 보되 가끔은 뒤를 돌아보고 복기하며 나를 고쳐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늘 제대로 된 사회, 노력이 인정받는 사회를 말하면서도 한편으론 이렇게 부족하고 허물 많은 나임을 잊지 말자. 그것으로부터 배우고 또 고치고 바르게 행동하다 보면 언젠가 정말 더 넓고, 크고, 멀리 보는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단지 나의 말이 불평으로 끝나지 않는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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